전경련 손병두 상근부회장은 요즘 일할 맛이 안난다.

2개월넘게 고생해서 만든 5대그룹 사업구조조정안이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부 일각에서 제재조치까지 마련하고 있다니 속이 탈 따름이다.

12~14일 WEF(세계경제포럼)회의 참가를 위해 싱가포르로 떠나는
손 부회장을 만났다.

잇몸이 상했다며 시종 찡그린 얼굴이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그동안 집엔 제대로 들어갔습니까.

"새벽에라도 꼭 들어갔지만 잠 한번 편히 못잤어요.

몸무게가 3kg 이나 빠졌습니다.

잇몸이 아래위로 다 상했어요.

고름이 많이 차 그냥 두면 골수염이 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틀니를 해야한답니다"

-회의가 그렇게 많았나요.

"수첩에 기록하다가 포기할 정도였지요.

하루에도 몇번씩 모였어요.

7개 업종 17개 회사나 되니 회의종류도 많았습니다.

업종마다 사장 임원 부서장급이 만나는 회의가 따로 있었어요.

1개 그룹을 봐도 회장이 나오는 회의, 구조조정본부장, 실무추진반이
만나는 모임을 별개로 했어요"

-5대그룹 회장 회의는 몇번이나 했습니까.

"5대그룹 총수들은 7월4일 청와대 회의 이후 공식적으로는 여섯번
만났습니다.

그외에도 김우중 회장이 이쪽 저쪽을 다니며 비공식 접촉을 가진 일이
많았습니다.

김회장은 구본무 회장과는 부부동반으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김 회장이 다른 회장들 집에도 찾아가고 힐튼호텔내 김 회장 집무실
(펜트하우스)에 다른 총수들이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주로 호텔롯데에서 모였다지요.

"롯데를 중심으로 시내 여러곳에서 만났습니다.

롯데를 본부로 한 이유는 모이기가 좋아서였습니다.

또 백화점 지하철 등 들어오는 통로가 많아 남의 눈을 피하기도 쉬웠고요"

-정부 일각의 평가가 안좋아서 섭섭하겠네요.

"섭섭하다기 보단 억울하지요.

기업들이 이렇게 어렵게 합의한 것을 잘못됐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관치금융, 관치경제로 돌아가자는 건가요"

-잘못됐다기 보다 기대에 미흡하다는 것 아닙니까.

"찬찬히 성과를 따져보면 그런 얘기 못합니다.

지난 8월말 해도 2~3개 업종밖에 못할 줄 알았던 것 아닙니까.

이게 7개 업종 17개사로 늘었습니다.

사업구조조정 대상 규모가 17조원입니다.

5대그룹 매출의 15.5%이지요.

자동차까지 구조조정대상이 되면 40%로 늘어납니다.

결코 스몰딜이 아닙니다"

-경영주체를 결정짓지 못해 시간이 더 걸리게 된 것 아닌가요.

"서로 안 합치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11월말까지만 기다리면 됩니다.

지배주주와 경영주체결정방식은 완전히 합의했잖아요.

시간은 마찬가지예요.

반도체의 경우 경영주체가 선정됐다고 해도 양사가 정산을 위해서라도
평가를 해야 해요.

어차피 똑 같은 일정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평가가 나오고 있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정부와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국민에게 기대치를 크게 높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3일과 이달 7일 발표 직전에 언론에 협상결과를 흘려서 김을
뺀게 누굽니까.

이미 구문이 된 상태에서 발표를 하니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온 것입니다"

-재계로서는 할만큼 했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물론입니다.

이번 구조조정을 통해 대부분 그룹은 주주로만 남게 됩니다.

전문경영인을 세우게 돼 소유와 경영도 분리되지요.

통합법인에 대규모 외화도 곧 들어올 겁니다.

이만한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낸 것은 대단한 진전입니다.

재계가 자율적으로 중복투자를 정리한 건 초유의 일입니다"

-외국의 시각은 긍정적이지요.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시장경제주의가 정착되느냐 않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자유시장경제주의에 입각해 자율적으로 경영을 하느냐 아니면
정부가 옛날식으로 간섭하느냐를 주시하고 있지요.

한국인들 스스로 "못한 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역할을 줄일 수록 좋다는 얘기 같습니다.

"정부는 제도적 걸림돌을 제거하는 선에서 개입을 최소화하면 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선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업살리기는 곧 실업자 안만들기입니다.

이 이상 확실한 명분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면 같은 사안을 놓고 왜 정.재계가 계속 마찰을 빚는 건가요.

"개혁(reform)과 기업구조조정(restructuring)이 자주 혼동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개혁은 제도와 법을 뜯어고치는 것이지요.

과감할 수록 좋습니다.

기업구조조정은 달라요.

속도의 함수라기 보다는 효율의 함수입니다.

얼마나 빨리 하느냐 보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경제에 관한 한 정부가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하면 기업은 자연히 이를
좇아가면서 구조조정을 하게 돼있습니다.

못하면 도태되기 때문이지요.

기업을 흔히 "환경 적응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긍정적으로 평가만 해준다면 기업구조조정이 잘된다는 건가요.

"5대그룹은 국민경제를 대표하는 기업집단으로서 이번에 "한국 기업
구조조정의 모델"을 만들자고 약속했습니다.

두고 보세요.

통합법인을 세우기로 한 석유화학 반도체 항공 등엔 곧 대규모 외자가
들어올 겁니다.

기업 구조조정의 선순환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지요"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