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 < 한국외국어대 교수 / 경제학 choik@hufs.maincc.ac.kr >

추석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지방 나들이를 하였다.

많은 사람을 접하지는 못했으나 만난 분들 중 상당수가 정부의 씀씀이가
아직도 매우 헤프다는 지적을 하였다.

어느 한 분은 최근의 실업대책을 놓고 국민혈세의 낭비를 조목조목 지적하며
비분강개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농업 건설 국방 등 주요 국가사업에서 엄청난 낭비를 수없이
보아왔다.

특히 최근의 경우 세금이 모자라 국.공채를 발행하여 조달되는 자금도
새로운 가치창출과는 무관한 비생산적인 사업에 방대한 규모로 투입되고
있다.

퇴출되는, 망하는 기업도 거들떠보지 않을 각종 사업에 구조조정의 최종적
책임을 지고 있는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계속 투입하고 있다.

만약 정부정책의 목적이 일자리 창출만이라면 사실 정책의 방향과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실업자들로 하여금 하루는 구덩이를 파게 하고 다음날은 전날 판 구덩이를
메우도록 하는 일을 되풀이하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일자리가 제공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식의 일자리 창출만으로는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이는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가치를 부여
하는 재화나 용역의 생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정책의 방향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민간부문의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수출을 늘릴 수 있고 고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

재정적자의 규모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는 할수 없으나 재정적자
규모 자체는 큰 의미가 없으며 정책적 관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산의
규모와 그 내역이다.

세출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많이 창출하고 국민복지에 크게 기여한다면 적자
재정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입이 넘쳐 재정이 흑자를 유지하더라도 불필요하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
세출이 투입되면 국민경제는 결국 파탄나게 된다.

재정이 국가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사회기강을 해이시키는 사실은 사실로서
인식되지도 않기에 우리 사회에 엄청난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재정운용이 효율적이지 못할 때는 그 자체로서도 문제이지만 민간부문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에 국가전체로서 문제가 야기된다.

우리와 같이 공공부문이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여건에서 공공부문의 헤픈
쓰임새는 민간부문의 과소비를 유도하고, 공공부문에서의 조그마한 빈틈은
사회전체 기강의 해이를 초래한다.

현실에서 예산은 정치가와 관료에 의해 수립 심의 집행된다.

예산의 규모가 확대되는 것은 곧 정치가나 관료의 국민경제에의 개입증대를
의미한다.

관료나 정치가들은 특정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외형적으로 훌륭한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현실에서 명분은 명분으로 끝나고 명과 실이 상부하지 않음은 동서
고금에서 관찰되는 바이다.

시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돈을 관리하는 일반투자자와는
달리 관료는 자신의 돈이 아닌 납세자의 돈을 관리하며 그 관리의 결과도
자신이 전적으로 향유하지 못하므로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최선의 결과가 도출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관료들의 경우 낭비적인 투자가 채택되더라도 그들의 보수나 운명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때로는 아무리 낭비적 투자가 되더라도 많이만 하면 일을 잘 하는 것으로
비쳐져서 칭찬을 받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개인 기업 금융기관 정부 등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도 국제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중한 자원을 생산성이 없거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 계속 투입한 데 있다.

진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원사용 우선순위와 구체적 내용은
경제위기 이전과 크게 변함이 없다.

현실의 불가피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업, 저 사업 벌이기 보다는 지금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예산규모를 상당부분 줄이는 것이 구조조정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시금석을 놓는 길이다.

이 과정에서 정책당국은 지도력을 발휘하고 국민은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