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의 배반" 다국적기업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아시아와 중남미 러시아를 휩쓴 금융위기로 매출이 급감하고 있어서다.

세계 곳곳에 설치된 다국적 기업들의 매장은 잇달아 셔터를 내리고 있다.

라인을 정지시키는 공장들도 늘어간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는 다국적 기업의 속성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축소"라는 전략까지 등장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전도사였던 다국적기업들이 이제는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발목을 잡혀 몸집 줄이기에 급급한 것이다.

면도기기 제조업체인 질레트는 12곳 이상의 해외공장과 사무소의 문을
닫는다.

이로 인해 4천7백명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

모토로라는 아시아에서의 수요감소로 미국 리치몬드에 세우기로 했던
3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칩 공장 건설 계획을 백지화했다.

유럽의 ''대표선수''인 알카텔과 필립스도 매출하락으로 곤경에 처했다.

금융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 증권사인 미국의 메릴린치는 3 4분기 순수익이 1억2천4백만
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분의 1로 격감했다.

이에따라 3천4백명의 종업원을 해고할 예정이다.

시티그룹 역시 한해전보다 50%가량 이익이 줄어 대량해고가 불가피할
전망이고 일본 다이와증권은 해외 사무소중 3분의 1을 폐쇄하면서 해외부문
인력의 40%를 해고한다는 계획이다.

미국 담배제조회사인 RJR나비스코는 러시아 유통업자들의 도산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유통업자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담배를 시장에 뿌리지 못하는 것.

결국 페테스부르크의 제조공장을 일시폐쇄했다.

그래도 올해 영업손실은 4천만달러에 이른다.

환율도 문제다.

질레트는 올해 태국에서 작년보다 23%나 물건을 더 팔았다.

그러나 매출은 24% 줄었다.

현지 바트화의 가치가 폭락한 탓이다.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셈이다.

"작년까지만해도 기업들에게 글로벌리제이션은 지상과제로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악이 되고 있다"(AIM 어드바이서스 책임투자담당이사).

그러나 글로벌리제이션이 더이상 효과가 없다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오히려 GE처럼 헐값에 나온 아시아 기업들을 매입해 영역을 확장하려는
기업들도 있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금융위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국적
기업들의 사업 축소는 불가피하다"(로자벳 모스 칸터 하바드대학 교수)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글로벌리제이션을 기치로 성장해온 다국적기업들이 이번에는 어떻게
"글로벌리제이션의 함정"을 이겨나갈 것인 지 주목된다.

< 조주현 기자 fores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