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사 창립멤버, 최장근속 직원, 최고위 한국인 임원...

한국릴리 전직원의 맏형격인 박종길(46) 상무의 이름에는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담당업무는 마케팅.

회사의 제품기획에서 포지셔닝, 판매전략 등 핵심업무를 총괄하는게 그의
임무다.

맡은 일은 마케팅이지만 생산 영업 교육까지 모르는 분야가 없을만큼 회사
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

경리와 총무를 빼면 안거친 부서가 없다.

이런 박 상무가 2백여명 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미국 본사인 일라이 릴리의 서구식 문화와 한국적 풍토를 잇는 다리역할도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만은 않다.

10여년전 차장 시절의 일이다.

한 영업부 직원이 고객에게 접대를 했다.

한국적 풍토에서는 그리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본사에서 접대를 금지한다는데 있었다.

한국적 영업풍토와 미국 기업의 회사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 직원은
접대비를 다른 명목의 회사 비용으로 처리했다.

가짜영수증 사건이 본사에 알려지는 날이면 그 직원은 당장 해고될
판이었다.

고민하던 박 상무는 이 사건을 상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해당직원에게 다시는 접대영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아
두었다.

영업실적을 올리겠다는 의욕이 앞섰던데다 한국과 미국의 기업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긴 "사고"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얼마후 우연히 이 사건을 알게 된 외국인 사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상사에게 보고할 의무"를 어긴 박 상무도 해고대상이라는 경고까지 했다.

박 상무의 능력 등이 고려돼 해고조치까지 상황이 악회되지는 않았지만
"월급동결"이란 징계를 받았다.

한국인 직원들의 맏형노릇을 해야하는 박 상무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그의 첫 직장은 한국회사였다.

서울대 약대출신인 그는 졸업후 한국의 한 제약회사에 입사했었다.

거기서 공장장까지 지내며 8년간 근무했다.

한국식 경영에 젖어있던 그가 릴리로 옮긴뒤 미국식 경영에 당황했던 경험도
적지 않다.

커피 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과거 한국회사에서는 커피는 기본이고 책상정리까지 비서가 해줬다.

그러나 한국릴리에서는 전혀 달랐다.

상무인 지금도 그는 커피를 직접 타 마신다.

아랫직원을 불러 "<><> 좀 해오시오"라고 했다가 "제가 할일이 아닌데요"
라는 당돌한 대답을 들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모든게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이처럼 편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 없다"싶은 생각이다.

커피를 타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랫직원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도 다
직원 개개인의 할일이 명확히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맡은 일이 뚜렷한 만큼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정확하다.

책임경영도 여기서부터 가능해진다.

회사의 모든 일이 개인보다는 시스템 속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회사일도
효율적이다.

이게 바로 "합리적 경영"의 기초이기도 하다.

박 상무가 다국적 기업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릴리에서는 모든 의사결정이 합의에 의해 이뤄진다.

마케팅 영업 경리 등 모든 분야의 임원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경영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사장이 혼자 주장한다고 통과되는게 아니다.

다국적 기업의 힘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합심해 일을 추진하는데서 나온다.

IMF이후 외국제품 배격운동 움직임이 거세졌다.

외국 제약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사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대한 박 상무의 항변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국내기업이라고 언제까지나 보호막속에 있을 수는 없죠.

매출액의 16~17%를 연구개발(R&D)에 퍼붓는 릴리의 제품과 경쟁할때
국내기업들도 경쟁력을 키울수 있습니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전파하는 다국적 기업의 역할도 무시해선
안됩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