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 중의 하나인 서악으로 꼽혀왔다.

주봉인 천황봉에서 연천봉 그리고 삼불봉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의 볏을 쓴 용과 같다 해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시대부터 큰 사찰이 창건되어 동쪽으로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동학사, 북서쪽으로는 갑사, 그리고 남서쪽에는 신원사가 삼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종교취락인 신도안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을 창건한 이태조는 신하인 권중화를 시켜 도읍터를 물색케했다.

권중화는 계룡산 남쪽을 중심으로 한 도읍의 지도를 작성해 올렸다.

태조는 이것을 보고 천도를 결심한다.

이 지역이 현재의 신도안이다.

기초를 닦기위한 주춧돌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이 국도로 부적당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 1년만에 공사를 멈추었다.

하륜의 반론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도읍은 모름지기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지리적 이점을 얻을 수 없다.

둘째 송나라의 풍수가인 호순신이 저술한 지리신법의 이론을 따르면
산자락은 건방(서북방)에서부터 발원하고 물(금강)은 손방(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좋은 기운이 물의 흐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리는 수파장생(물이
장생의 기운을 파괴한다)의 쇠패입지의 땅이다.

결국 이태조는 신도안으로의 천도계획을 수정하여 오늘날의 서울땅에
수도를 정하게 된다.

그러나 하륜의 주장은 후세 풍수가들의 예리한 안목에 의해 그 근본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순신의 체계를 어설프게 적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계룡산이 명산임을 입증하는 자료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행정의 요람으로 정부 제3청사가 둘어서고 군 통수의 핵심인 계룡대와
군 교육의 핵심인 자운대가 위치하며 무엇보다 과학한국의 요람으로서
선비마을(유성)에 펼쳐진 대덕연구단지가 이를 대변한다.

성철재 <충남대 언어학과교수/역학연구가 cjseong@hanbat.chungnam.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