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창간 34돌] 기업 : 불황 이겼다 .. '이렇게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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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하게 성장하던 남양키친플라워도 한때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87년 6.29선언이후 불어닥친 노사분규가 전국을 휩쓸며 이듬해 봄 인천을
강타했다.
이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업원들의 농성이 시작됐고 공장기계도 멈춰버렸다.
바이어들은 제품을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쳤지만 단 한 건의 수출도
할 수 없었다.
서달용 사장은 애타는 마음으로 공장을 지켜봤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는 결국 20여년간 자식처럼 여기며 인생을 바쳐온 공장을 닫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폐업과 공장매각 방침을 밝히자 직원들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렸다.
이들간에 내분이 일면서 파업을 주도한 강경파가 회사를 떠나고 공장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래처와의 신용이 땅에 떨어져 고전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코닝이 남양에 협력을 제의해왔다.
고임금 때문에 주방용품 생산라인의 해외이전을 추진중이던 코닝이 남양의
기술수준과 제조능력을 인정한 것.
남양은 결국 코닝의 금형과 설비를 이전받아 제품을 납품, 회사가 제자리를
찾고 수출길도 뚫게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2일자 ).
87년 6.29선언이후 불어닥친 노사분규가 전국을 휩쓸며 이듬해 봄 인천을
강타했다.
이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업원들의 농성이 시작됐고 공장기계도 멈춰버렸다.
바이어들은 제품을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쳤지만 단 한 건의 수출도
할 수 없었다.
서달용 사장은 애타는 마음으로 공장을 지켜봤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는 결국 20여년간 자식처럼 여기며 인생을 바쳐온 공장을 닫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폐업과 공장매각 방침을 밝히자 직원들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렸다.
이들간에 내분이 일면서 파업을 주도한 강경파가 회사를 떠나고 공장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래처와의 신용이 땅에 떨어져 고전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코닝이 남양에 협력을 제의해왔다.
고임금 때문에 주방용품 생산라인의 해외이전을 추진중이던 코닝이 남양의
기술수준과 제조능력을 인정한 것.
남양은 결국 코닝의 금형과 설비를 이전받아 제품을 납품, 회사가 제자리를
찾고 수출길도 뚫게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