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창간 34돌] 정책과 전략 : '힘찬 약진' ..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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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로 시작해 반도체까지"
해방 이듬해인 지난 46년 한국수출은 3백50만달러 남짓했다.
나라 전체의 한해 수출액이 요즘 웬만한 중소기업의 수출실적에 지나지
않았다.
액수도 형편없었지만 오징어 활선어 철광석 중석 생사 등 수산물과 광산물이
대부분이었다.
후진국 수출의 전형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수출이 작년엔 1천3백62억달러로 늘어났다.
수출주력은 반도체 자동차 선박 컴퓨터 등 선진국형으로 완전 탈바꿈됐다.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수출은 4만배로 늘었다.
이는 해마다 평균 23%씩 증가한 것으로 세계 최고기록이다.
한국은 96년 기준으로 세계 12위 무역대국이고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이
2.5%에 이른다.
역시 세계 12번째로 지난 95년에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수출의존도는 지난 60년 19.8%에서 96년에는
58.3%로 급증했다.
<> 초창기(46~59년) =남북분단과 6.25동란.
이런 상황에서 수출다운 수출이 이뤄질 수 없었다.
50년까진 수산물이 주종을 이뤘고 그 이후엔 흑연 중석 등 광산물이 70%를
차지했다.
무역지식부족으로 홍콩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에 의존하다가 50년대
중반이후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직수출을 하게 됐다.
<> 수출드라이브(60년대) =한국수출은 3공화국 출범이후 수출드라이브에
힘입어 비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유럽국가들이 이른바 "황금의 60년대"라고 불렀을 정도로 세계
시장 상황도 좋았다.
60년대 10년을 통해 한국수출은 연평균 41%씩 늘어나는 경이적인 실적을
쌓았다.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공산품의 비중이 60년 20.9%에서 69년엔 81.4%로
급증했다.
특히 섬유는 총수출의 41%를 차지할 정도로 60년대 수출총아였다.
정부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로컬신용장제도를 도입하고 우량수출업체에
대한 세무조사를 면제하는 등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총동원했다.
<> 1백억달러 달성(70년대) =1, 2차 오일쇼크 속에서도 세계총수출 증가율
20.5%를 크게 상회하는 연평균 37.5%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77년엔 1백억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정부는 중화학 제품의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79년엔 중화학제품 수출이 전체의 38%로 늘어난 반면 경공업제품 수출비중
은 낮아졌다.
수출품목도 다양해져 70년대 10년을 통해 1천5백4개에서 5천9백94개로
불어났다.
수출대상국도 1백60개국으로 늘었다.
<> 3저 효과와 무역흑자(80년대) =60~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이 결실을
본 시기다.
86~89년 4년간 사상 처음으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3저 현상(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엔고)도 흑자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시기에 수출상품구조도 중화공제품 중심으로 완전 정착됐다.
특히 자동차 수출은 79년 1억3천달러에서 89년엔 21억2천만달러로 신장됐다.
<> 시장개방과 무역적자심화(90년대) =80년대 무역흑자를 과신한 나머지
준비없이 시장개방을 너무 빨리 추진한 결과 무역수지가 급속히 적자로
반전됐다.
반도체가 새 수출주력으로 등장했지만 대세를 바로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96년엔 사상최대인 2백6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수지적자의 급격한 증가는 한국경제가 IMF체제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3일자 ).
해방 이듬해인 지난 46년 한국수출은 3백50만달러 남짓했다.
나라 전체의 한해 수출액이 요즘 웬만한 중소기업의 수출실적에 지나지
않았다.
액수도 형편없었지만 오징어 활선어 철광석 중석 생사 등 수산물과 광산물이
대부분이었다.
후진국 수출의 전형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한국수출이 작년엔 1천3백62억달러로 늘어났다.
수출주력은 반도체 자동차 선박 컴퓨터 등 선진국형으로 완전 탈바꿈됐다.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수출은 4만배로 늘었다.
이는 해마다 평균 23%씩 증가한 것으로 세계 최고기록이다.
한국은 96년 기준으로 세계 12위 무역대국이고 세계수출시장 점유율이
2.5%에 이른다.
역시 세계 12번째로 지난 95년에 수출 1천억달러를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경제의 수출의존도는 지난 60년 19.8%에서 96년에는
58.3%로 급증했다.
<> 초창기(46~59년) =남북분단과 6.25동란.
이런 상황에서 수출다운 수출이 이뤄질 수 없었다.
50년까진 수산물이 주종을 이뤘고 그 이후엔 흑연 중석 등 광산물이 70%를
차지했다.
무역지식부족으로 홍콩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에 의존하다가 50년대
중반이후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직수출을 하게 됐다.
<> 수출드라이브(60년대) =한국수출은 3공화국 출범이후 수출드라이브에
힘입어 비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유럽국가들이 이른바 "황금의 60년대"라고 불렀을 정도로 세계
시장 상황도 좋았다.
60년대 10년을 통해 한국수출은 연평균 41%씩 늘어나는 경이적인 실적을
쌓았다.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공산품의 비중이 60년 20.9%에서 69년엔 81.4%로
급증했다.
특히 섬유는 총수출의 41%를 차지할 정도로 60년대 수출총아였다.
정부는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로컬신용장제도를 도입하고 우량수출업체에
대한 세무조사를 면제하는 등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총동원했다.
<> 1백억달러 달성(70년대) =1, 2차 오일쇼크 속에서도 세계총수출 증가율
20.5%를 크게 상회하는 연평균 37.5%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77년엔 1백억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정부는 중화학 제품의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79년엔 중화학제품 수출이 전체의 38%로 늘어난 반면 경공업제품 수출비중
은 낮아졌다.
수출품목도 다양해져 70년대 10년을 통해 1천5백4개에서 5천9백94개로
불어났다.
수출대상국도 1백60개국으로 늘었다.
<> 3저 효과와 무역흑자(80년대) =60~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이 결실을
본 시기다.
86~89년 4년간 사상 처음으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3저 현상(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엔고)도 흑자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시기에 수출상품구조도 중화공제품 중심으로 완전 정착됐다.
특히 자동차 수출은 79년 1억3천달러에서 89년엔 21억2천만달러로 신장됐다.
<> 시장개방과 무역적자심화(90년대) =80년대 무역흑자를 과신한 나머지
준비없이 시장개방을 너무 빨리 추진한 결과 무역수지가 급속히 적자로
반전됐다.
반도체가 새 수출주력으로 등장했지만 대세를 바로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96년엔 사상최대인 2백6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수지적자의 급격한 증가는 한국경제가 IMF체제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