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벙어리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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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올리버 박사.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고문이었다.
이 전대통령이 워싱턴 죠지타운대에서 공부하던 때부터 가까이서 지켜 온
그는 이 전대통령을 잘 아는 몇 안되는 산증인중 한 사람이다.
얼마전 건국50주년기념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전대통령이
보여준 외교방식의 독특한 단면 한가지를 소개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이 전대통령은 미국 국무부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은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규모인 20억 달러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대통령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늘 불만을
표시하고 사사건건 대들고 있었다.
외교적 유연성과 수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게 올리버 박사의 회고다.
참다못해 올리버 박사가 대통령에게 진언을 했다.
"말을 아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에대한 대통령의 반응이 의외다.
"내가 떠들지 않으면 미국사람 중에 누가 우리를 거들떠 보겠는가.
내가 선동적이지 않으면 누가 한국이 독립국 임을 인정해 주겠는가.
나도 상대방의 느낌 정도는 헤아릴 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그것이 내 생활의
전부처럼 되어 버렸고, 또 너무 오래동안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버릇이 돼
고칠 수도 없게 돼 버렸다"
시대가 변한 지금에 이르러서 이 전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을 본받자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주의를 끌 수 있는 짓이라면 무엇이라도 서슴치 않는 북한식 외교를
도입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우리 몫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진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같은 맥락에서 최근 한국 외교부가 펼치고 있는 "벙어리식 외교"는
재고의 여지가 많다.
특히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180억달러를 출자하면서 의회와
업자들이 담합,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섬유 조선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조건을 삽입한 데 대한 외교부의 자세는 실망 그 자체였다.
러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제쳐 놓고 유독 한국만 지목해서 거론한 것은
미국으로서도 명분을 잃은 행동이었다.
특히 IMF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말아야 한다고 미리부터 쐐기를 박고 나온 미국의 처사는 분명 순수한
동기에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반응은 심의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나서서 발표한 "유감"표명이 고작이었다.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마지못해 들고 나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버스 지나가고 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한국이 아무리 외환위기를 맞아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충분히 할말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까지 침묵 아닌 벙어리 흉내로
일관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의 자동차협상에서 조세주권주의를 유난히도 부르짖던 한국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리부터 발가벗고 나왔다는 지적이 많다.
일관성이라고는 찾아 볼길이 없다.
자동차협상을 기화로 우리경제의 가장 큰 골치거리인 조세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흔적은 찾아 볼 길이 없다.
"외교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라는 게 외교부 장관의 평소지론이라는
얘기는 잘알려져 있다.
물론 장관의 진의는 외교노선의 큰 줄거리는 대통령이 정할 몫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론이 확대 해석돼 실무자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이며
때때로 공격적인 외교자세까지 미리 꺾어버리는 제약요건으로 둔갑돼서는
곤란하다.
대통령도 아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줘야 손발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외교는 예술이다.
지휘봉을 든 사람의 신호에 따라 모든 악기가 제 때에 제소리를 내야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미국 대사관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고는 곤란하다.
대사관은 대사관대로 해야할 일을 찾아 하고 본국에서는 본국대로의
지원사격이 있어야 효과적인 외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침묵이 금 일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전대통령의 말대로 우리가 떠들지 않는 한 누가 우리를
알아주고 챙겨주겠는가.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9일자 ).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고문이었다.
이 전대통령이 워싱턴 죠지타운대에서 공부하던 때부터 가까이서 지켜 온
그는 이 전대통령을 잘 아는 몇 안되는 산증인중 한 사람이다.
얼마전 건국50주년기념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전대통령이
보여준 외교방식의 독특한 단면 한가지를 소개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이 전대통령은 미국 국무부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은 당시로서는 적지않은 규모인 20억 달러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대통령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늘 불만을
표시하고 사사건건 대들고 있었다.
외교적 유연성과 수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게 올리버 박사의 회고다.
참다못해 올리버 박사가 대통령에게 진언을 했다.
"말을 아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에대한 대통령의 반응이 의외다.
"내가 떠들지 않으면 미국사람 중에 누가 우리를 거들떠 보겠는가.
내가 선동적이지 않으면 누가 한국이 독립국 임을 인정해 주겠는가.
나도 상대방의 느낌 정도는 헤아릴 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그것이 내 생활의
전부처럼 되어 버렸고, 또 너무 오래동안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버릇이 돼
고칠 수도 없게 돼 버렸다"
시대가 변한 지금에 이르러서 이 전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을 본받자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주의를 끌 수 있는 짓이라면 무엇이라도 서슴치 않는 북한식 외교를
도입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우리 몫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진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같은 맥락에서 최근 한국 외교부가 펼치고 있는 "벙어리식 외교"는
재고의 여지가 많다.
특히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180억달러를 출자하면서 의회와
업자들이 담합, 한국의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섬유 조선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조건을 삽입한 데 대한 외교부의 자세는 실망 그 자체였다.
러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제쳐 놓고 유독 한국만 지목해서 거론한 것은
미국으로서도 명분을 잃은 행동이었다.
특히 IMF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말아야 한다고 미리부터 쐐기를 박고 나온 미국의 처사는 분명 순수한
동기에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반응은 심의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나서서 발표한 "유감"표명이 고작이었다.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마지못해 들고 나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버스 지나가고 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한국이 아무리 외환위기를 맞아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충분히 할말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까지 침묵 아닌 벙어리 흉내로
일관한다는 것은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의 자동차협상에서 조세주권주의를 유난히도 부르짖던 한국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리부터 발가벗고 나왔다는 지적이 많다.
일관성이라고는 찾아 볼길이 없다.
자동차협상을 기화로 우리경제의 가장 큰 골치거리인 조세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흔적은 찾아 볼 길이 없다.
"외교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라는 게 외교부 장관의 평소지론이라는
얘기는 잘알려져 있다.
물론 장관의 진의는 외교노선의 큰 줄거리는 대통령이 정할 몫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론이 확대 해석돼 실무자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이며
때때로 공격적인 외교자세까지 미리 꺾어버리는 제약요건으로 둔갑돼서는
곤란하다.
대통령도 아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줘야 손발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외교는 예술이다.
지휘봉을 든 사람의 신호에 따라 모든 악기가 제 때에 제소리를 내야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미국 대사관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고는 곤란하다.
대사관은 대사관대로 해야할 일을 찾아 하고 본국에서는 본국대로의
지원사격이 있어야 효과적인 외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침묵이 금 일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전대통령의 말대로 우리가 떠들지 않는 한 누가 우리를
알아주고 챙겨주겠는가.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