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 < 연세대 교수. 심리학과 >

한국이 IMF통제체제로 진입한지 어언 1년이 다가오고 있다.

민과 관이 열심히 외자유치에 나선 결과 일단 국가부도사태는 면한 것같다.

그러나 1천5백억달러나 되는 외채를 상환하려면 아직도 갈 길은 요원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환란이 생기게 된 원인을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그 원인이 종금사의 무리한 외자도입, 기업의 방만한 경영
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외견상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짚지는 못한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환란 원인은 한국인의 가치관에서 비롯되었고 이 가치관의
변모가 없는한 IMF체제의 극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방이후 서구문명과 접촉하여 개인책임적 가치관을 형성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농경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집단
공동체의 가치관이 뿌리박혀 있다.

5.16혁명후 국가경제정책은 관주도의 정책이었고 이는 새마을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자본이 취약하고 국민 전체의 교육수준이 국졸정도인 당시의 상황에서는
국가주도의 경제정책과 새마을사업이 큰 성과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정책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국민의 집단공동체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개인책임적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했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에서의 민주화 열기는 우리나라에 민주화를 토착화하고
국가권력을 분산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두 정권 역시 국민의 개인책임적 가치관을 정착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근로자들의 무리한 임금인상투쟁이 번번이 성공함에 따라 근로자들의
집단공동체 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집단공동체 의식이 가져다 주는 큰 부작용은 관주도의 경제정책, 이윤과
생산성의 무시, 개인적 책임의 부재 등으로 나타났다.

우리 정부나 민간기업이 이윤보다는 외형을, 책임보다는 평등을, 재투자
보다는 분배를,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우리의 기업이
망했고 환란이 초래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공동체 의식은 비단 정부나 기업에서만 발휘되지 않는다.

국민 전체에서 작용하고 있는데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선거에서
능력보다는 지역 출신성분이 당락을 좌우한다.

우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엘리트집단에서도 똑같은 집단공동체 의식이
나타나는데 대학의 학장.총장 선거에서 후보자의 능력보다는 고등학교 출신
성분이 더 우선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각종 이익집단의 갈등도 따지고 보면 집단공동체
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은 서구의 개인책임적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가 한보와 기아를 개인책임적 정신에 입각하여 과감하게 정리했었더라면
우리의 환란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철저한 능력주의, 개인이 책임을 지는 그러한 개인책임적 가치관이 정립
되어야만 온 국민이 정신을 바로 차리고 심기일전할 수 있다.

실업자의 대책도 어느정도 개인책임적 가치관을 토대로 해야한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공산주의의 집단평등주의는 현재 인간사회에
부적합한 패러다임인 것으로 판가름났다.

"무덤에서 요람까지"의 유럽의 복지제도도 복지혜택 당사자는 물론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큰 저해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정부는 노숙자, 빈민계층의 실직자들에게 최소한의 의료와 복지혜택을
제공해야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는 집단공동체적 차원의 복지혜택은
자제해야한다.

그러한 정책은 오히려 자립심과 책임감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IMF통제체제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국민이 제2의 도약을 기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집단공동체 의식하에 경제성장을 누려왔지만 이것의 한계가
이번에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집단공동체 가치관에 토대를 둔 우리의 경제구조는 어차피
결딴이 나게 마련이었다.

다만 우리가 그 위기를 너무 갑작스럽게 경험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 패러다임이 개인책임적 가치관으로 바뀌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IMF체제 극복은 요원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