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생성 미학..뇌졸중 투병 이형기씨 새 시집 '절벽'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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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높게/날카롭게/완강하게 버텨 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몸을 던질 밖에 다른 길이 없는/냉혹함으로/
거기그렇게 고립해 있고나/아아 절벽!" ("절벽"전문)
뇌졸중으로 5년째 투병중인 시인 이형기(65)씨가 새 시집 "절벽"
(문학세계사)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는 그가 병상에 누워 쓴 신작시 42편과 간결하고 압축된
아포리즘 95편이 실려 있다.
오랜 투병생활 때문인지 유독 죽음에 관한 작품이 많다.
시인에게 죽음은 소멸과 생성을 한꺼번에 관조하는 순환의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절멸의 경계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의 꽃을 노래한다.
때로는 "쫓기고 쫓겨서/더 이상은 갈데 없는/그 숲속에/시체 하나 버려져
있다/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한 매듭")라고 돌아보다가 "한 때의 식욕이
따먹고 버린/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씨 하나에서/새로이 움터오는 과거의
시작을"("거꾸로 가는 시계")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한 정점이다.
그는 인적 없는 바닷가의 조개껍질 하나를 보고도 "덧없는 시간의
되풀이가 아무 뜻 없이/아름답게 녹아들어 하나된 그것은/없음이 만들어낸
없음의 빛깔/그래 그렇다 허무의 빛깔이다"("허무의 빛깔")라고 일깨운다.
그는 또 아포리즘 "불꽃 속의 싸락눈"에서 "모든 사물은 소멸함으로써
존재의 의의를 획득한다.
만일 어떤 사물이 영원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물을 기억할 필요도,
존재를 의식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의 존재에 대한 성찰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들은 죽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시인의 사망 기사에 속지 말아라.
과거의 의미있는 시인들은 모두 그대의 은밀한 시간 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일찍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 "낙화"에서 사라짐의 미학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던 그.
이제 시력 50년의 결정체를 모아 빛나는 잠언들을 우리에게 하나씩
돌려주고 있다.
경남진주 태생인 그는 17세에 "문예"지를 통해 최연소로 등단해 화제를
모았으며 오랜 신문기자 생활을 거쳐 동국대 교수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각종 계간 월간 문예지에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현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치료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일자 ).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몸을 던질 밖에 다른 길이 없는/냉혹함으로/
거기그렇게 고립해 있고나/아아 절벽!" ("절벽"전문)
뇌졸중으로 5년째 투병중인 시인 이형기(65)씨가 새 시집 "절벽"
(문학세계사)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는 그가 병상에 누워 쓴 신작시 42편과 간결하고 압축된
아포리즘 95편이 실려 있다.
오랜 투병생활 때문인지 유독 죽음에 관한 작품이 많다.
시인에게 죽음은 소멸과 생성을 한꺼번에 관조하는 순환의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절멸의 경계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의 꽃을 노래한다.
때로는 "쫓기고 쫓겨서/더 이상은 갈데 없는/그 숲속에/시체 하나 버려져
있다/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다"("한 매듭")라고 돌아보다가 "한 때의 식욕이
따먹고 버린/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씨 하나에서/새로이 움터오는 과거의
시작을"("거꾸로 가는 시계")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한 정점이다.
그는 인적 없는 바닷가의 조개껍질 하나를 보고도 "덧없는 시간의
되풀이가 아무 뜻 없이/아름답게 녹아들어 하나된 그것은/없음이 만들어낸
없음의 빛깔/그래 그렇다 허무의 빛깔이다"("허무의 빛깔")라고 일깨운다.
그는 또 아포리즘 "불꽃 속의 싸락눈"에서 "모든 사물은 소멸함으로써
존재의 의의를 획득한다.
만일 어떤 사물이 영원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물을 기억할 필요도,
존재를 의식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의 존재에 대한 성찰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들은 죽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시인의 사망 기사에 속지 말아라.
과거의 의미있는 시인들은 모두 그대의 은밀한 시간 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일찍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 "낙화"에서 사라짐의 미학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던 그.
이제 시력 50년의 결정체를 모아 빛나는 잠언들을 우리에게 하나씩
돌려주고 있다.
경남진주 태생인 그는 17세에 "문예"지를 통해 최연소로 등단해 화제를
모았으며 오랜 신문기자 생활을 거쳐 동국대 교수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각종 계간 월간 문예지에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현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치료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