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의 간판브랜드 "베스띠벨리"의 머천다이저(MD) 박우경 주임(30).

그녀는 "밥 잘하는 여자"다.

좋은 쌀을 골라 물을 적당히 붓고 불의 세기를 조절해가며 알맞게 뜸을
들이는 기술.

여기에는 쌀과 물의 비율을 정확히 재는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계량컵을 쓰면 어쩐지 제맛이 안난다.

수치이상의 그 무엇.

바로 손끝맛이 묻어나야 기름진 쌀밥이 지어진다.

그래서 MD들은 히트패션 만드는 일을 밥짓는데 비유한다.

정확한 시장분석과 여기에 따른 정확한 양의 원부자재 구매 및 생산발주.

이런 계수적인 능력도 필요하지만 트렌드를 읽고 맥을 짚어가는 동물적
감각이 겸비돼야 히트작이 탄생한다.

박 주임은 이런 면에서 뛰어난 MD다.

박 주임의 전공은 미술.

졸업직후 디자이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만큼 패션을 읽는 감각은 어느정도 타고 났다.

미적감각이 선천적 재능이라면 시장분석은 MD 경험을 통해 갈고 닦은
후천적 능력.

그녀가 한 소규모 패션업체에서 디자이너겸 MD로 일하던 91년에는 국내
의류업계에 MD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치 않았다.

당시에는 일본의 MD관련 자료를 번역해 그대로 실행하는게 그녀에게 유일한
MD 수업이었다.

박 주임은 단지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응용해서 나름의 분석틀을 만들고
실행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박 주임은 MD 불모지였던 의류업계에서 점차 실력을
인정받아갔다.

S,C업체 등을 거쳐 국내 최대 여성복업체인 신원의 간판 브랜드
"베스띠벨리"에 영입된 것은 지난해 4월.

그녀의 임무는 경기침체 여파로 휘청이기 시작한 "베스띠벨리"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박 주임이 베스띠벨리에 와서 처음 한 일은 "컬러 맵" 만들기였다.

지난 시즌에 출시한 옷들을 컬러별로 분류한뒤 색깔별 제품과 매출실적을
분석해 놓는 대형노트다.

이 노트를 보면 어떤 컬러의 제품이 많이 출시됐고, 그중 잘 팔린 컬러는
무엇인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소비자 취향이 무엇인지 금새 확인된다.

컬러맵은 초년병 시절, 일본자료를 번역해 가며 어렵사리 터득해 만든
박 주임의 자산이다.

박 주임은 순국산 MD다.

패션업계에 유학파도 많건만 그 흔한 연수조차 가본적이 없다.

게다가 박 주임은 대학(부산 동아대)까지 지방에서 나온 부산토박이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서울로 진출해 성공한 드문 케이스다.

화려한 학력을 자랑하는 패션계에서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어딨을까.

물론 학창시절, 사생대회를 휩쓸 정도로 탁월한 미적 감각과 MD 생활을
하면서 갈고 닦은 분석력이 성공의 최대 요인이다.

이런 MD의 기본자질 외에 한번 잡은 일은 끝까지 놓지 않는 끈질김도
그녀의 경쟁력이다.

박 주임에게는 "낙지 같은 여자"란 별명이 있다.

이 별명의 유래는 이렇다.

박 주임과 거래하던 한 소재업체 사장이 어느날 사라졌다.

약속한 납기를 넘긴것은 물론이고 전화연락조차 끊어버린 것이다.

1주일만에 나타난 그 사장은 "공장에 불이 나서..."라며 둘러댔다.

거짓말을 그냥 넘기면 거래관계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 박 주임은 "직접
확인하겠다"며 지방공장으로 따라나섰다.

1박2일 출장기간동안 대구와 부산 공장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화재는
핑계로 드러났고 그 사장은 "낙지같은 여자"라며 혀를 내둘렀다.

두주불사의 술실력과 튼튼한 체력도 남성의 세계인 MD계에서 그녀를 성공
시킨 요인.

밤새 술마시고 다음날 출근해 멀쩡히 일할 정도로 주량이 세다.

협력업체나 직장 내부에서 심한 갈등이 생기면 술한잔으로 풀기도 한다.

물론 이틀밤을 새고도 그떡 않는 체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 주임에게 98년은 기념비적인 해다.

2개의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올 3월 그녀는 첫딸을 낳았다.

또 하나는 베스띠벨리의 성공적인 재탄생.

신원으로 자리를 옮겨 베스띠벨리의 브랜드와 제품컨셉(개념)을 새로 바꾼
뒤 올해부터 실적이 상승곡선으로 올라섰다.

지난해 30%를 넘기 힘들었던 정상가 판매율이 올해는 60%이상으로 뛰었다.

새벽 1시께야 잠들고서도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남편의 아침밥을
짓는 박 주임.

프로 MD로서도, 프로주부로서도 그녀는 ''밥 잘하는'' 여자다.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