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이 산에 오른다.
가을 산은 나름대로 묘한 정취가 있다.
도토리나 밤같은 각종 열매들이 터질듯이 익어 자태를 뽐낸다.
나뭇잎은 발갛게 물들어 마지막 아름다움을 마음껏 자랑한다.
더할수 없이 맑은 공기와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는 세파에 찌든 마음에
청량제 구실을 한다.
가을산은 철학을 갖고 있다.
바람이 한번 불면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진다.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끝날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낙엽을 밟으면 사람은 우수에 젖게 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인생이 덧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자칫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힘든 때는 우수가 절망으로 변할수도
있다.
며칠전 아내와 산을 오르면서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정확히 10년전.
그때 나는 주머니에 수면제를 가득넣고 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희망이 없었다.
4년동안 무려 18억원을 쏟아부어 기술개발에 나섰지만 사업화에 실패했다.
전재산은 물론 금융기관 대출금과 친인척 돈도 모두 끌어 들였으나 갚을
길이 막막했다.
몇주일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결국 아내에게 같이 죽자고 얘기했고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 한병과 수면제를 가득넣고 산 정상에 오르니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보였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 혼자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가.
내가 죽는다고 모든게 해결되는가.
나를 도와주고 보증을 서 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서 한쪽 구석에선 희미하나마 한줄기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실패했지만 나에겐 아직도 많은 자산이 남아있지 않은가.
기계설계 소프트웨어 제어계측기술 등.
눈높이를 낮추니 희망이 솟아 올랐다.
그렇다.
다시 시작하자.
죽을 마음이 있으면 무엇인들 못할 것인가.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른다.
이중에는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절망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길은 있는 법이다.
낙엽이 지면 모든 것이 끝장인 듯 보인다.
하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움은 다시 트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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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