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도산이 줄을 잇고 있다.

소설가 겸 경제평론가 출신 장관으로 유명한 사카이야 다이치(63)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은 "일본이 생명력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2차대전이후
지속된 관료중심 체제를 혁파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카이야 장관은 그 방편으로 일본의 수도를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생리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는게 그의 인식이다.

사카이야 장관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의 유일한 민간출신 장관으로 그동안
"관료주도 사회 해체"를 일관되게 외쳐온 개혁론자로 잘 알려져 있다.

< 정리=박수진 기자 parks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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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본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다.

전후에는 폐허속에서 정.관.재계가 강력한 연대를 맺으며 난공불락의
"일본주식회사"를 구축했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가도를 달려 왔다.

이런 일본이 어쩌다 요즘 위기의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는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위기의 원인은 바로 일본을 일으켜 세웠던
전후체제에 있다.

아직도 일본인들은 일본주식회사를 가능케 했던 "정.관.재계 연합의 신화"
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강력하고 흔들림없는 "큰 것"만을 좋아하는 거대조직 환상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본은 이런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쇼크"가 필요하다.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수도를 아예 도쿄에서 다른데로 옮겨야 한다.

관료들을 중앙에서 "추방"해야 한다.

일본의 성장과정을 보면 왜 이같은 처방까지 필요한지가 자명해진다.

2차대전후 일본이 설정한 목표는 근대국가로의 이행이었다.

일본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구축했다.

일종의 정부주도 산업협동체제였다.

이 매커니즘의 논리는 간단하다.

관료들은 해외 선진국으로부터 우수한 기술들을 열심히 도입했다.

기업들은 이를 반대없이 채택했다.

재계와 관계의 협력체제다.

그 결과 전력과 핵발전, 통신 등에서 일률적인 가격체제와 마케팅기법이
갖추어졌다.

정부는 이런 체제를 통해 대형 기업군을 형성해 고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정부는 대신 기업들에게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다.

가격담합을 허용했고 다른 신규업체들의 진입도 막아 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재계 결합은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리스크를 "사회화"한 것이다.

기업들은 정부의 비호아래 앞뒤를 가리지 않고 투자했다.

투자의 효율성 등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정부가 원하는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기만 하면 됐다.

정부가 기업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부도같은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경제개발법은 80년대까지는 희망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일본은 자동차와 가전제품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을 갖게
됐다.

그러나 대량생산의 80년대가 지나 다양성이 경쟁력의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 90년대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더이상 소품종 대량생산체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미 고착화된 정부주도 협력체계는 기업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최근 금융시장의 잇따른 부도는 일본식 기업의 몰락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하다.

사실 대장상의 비호아래서 금융기관들은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경쟁해
본적이 없다.

모두 똑같은 이자와 대출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망할때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돼 있다.

바로 이런 왜곡된 기업상황이 2차대전이후 고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의
몰락을 앞당기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직 이런 문제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때가 좋았지.지금은 단지 약간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것 뿐이야"라는
안일한 목소리가 들린다.

관료들은 한술 더 뜨고 있다.

기업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외부로부터의 경쟁을 피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젊은이들 사이에도 만연해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직도 관료사회와 거대조직에 대한 동경을 깨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기업을 세우는 이는 별로 없다.

지난 10년동안 소규모 자영업자의 수가 7백4만명에서 6백만명으로 줄어
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자영업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주요 선진국들중 일본이 유일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대기업이나 관료조직에 들어가 퇴직 때까지
안락하게 사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있다.

조직이 거대화되면 필연코 설립과정에서의 목표를 잃고 왜곡될 수 밖에
없다.

당초 기업들은 성능 좋고 값싼 상품을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출발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기업이 안정화되면 점차 조직 자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생산성보다는 조직원들의 안전이나 복지문제 등을 우선시하게 된다.

조직이 이 단계에 접어들면 내부경쟁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한다.

조화롭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통한 분란보다는 안정이 더 필요해진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 창의력과 생산성의 저하다.

자연히 파격적인 승진이나 좌천보다는 연공서열제같은 이해하기 쉬운
기준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정보는 철저히 차단된다.

이것이 소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가족화된 조직"의 특징이다.

공공조직이나 사조직 모두 똑같다.

그러나 가족화된 조직은 여러가지 모순을 안게 된다.

이런 조직들은 소비자들이나 국민들의 이익보다는 담당 관리들의 이해관계
를 좇게 된다.

관료들이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기업의 인허가권을 갖고 있다.

인허가를 앞당기거나 늦추는 식으로 그들의 권력을 행사한다.

일본에서는 기업들이 현직 담당 관리들에게 퇴직후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개인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 반발할 면역성이 없다.

오히려 복종하는 것이 휠씬 쉽고 달콤하다.

정부가 가격담합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생산성이나 경쟁력보다는 기업내
종업원들간의 화합에만 신경쓰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자생력을 잃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이 이제라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과거의 영광을 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학시험을 패스하고 대기업에 들어가기만 하면 부와 영광을 보장받는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광과 명성은 오직 경쟁력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두번째로 일본의 기업들은 가족개념을 벗어나 "기능성"을 되찾아야 한다.

일본 기업들은 다른 기업만큼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창의력
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관료들도 이제라도 국민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누가 얼마나 공공의 이익을 좇는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캐캐묵은 연공서열제를 폐지해야 한다.

관료개혁은 행정개혁과 권력의 분산화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관주도의 산업협력시스템도 자연히 철폐될 것이다.

미국의 증권감독위원회(SEC)나 연방거래위원회(FTC)와 같은 심판관 기능
만을 갖는 관료체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관료들은 구단주나 룰 메이커, 코치, 심판관의 역할을
모두 하고 있다.

이같이 권력이 집중화된 산황에서는 기업이 경쟁력을 갖고 성장할 수 없다.

민간에게 자율권을 주어야 한다.

이런 방안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소 충격적이지만 수도를 도쿄에서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

관료들이 중앙에 앉아 이것저것 모두 간섭하고 관장하는 체제로서는 불가능
하다.

관료들이 스스로 심판관의 기능만 갖게 됐다고 인식할 수 있도록 물리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 LA타임스 신디케이트 독점전재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