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프로] (32) 제2부 : <20> '누드 모델' .. 하영은씨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가장 순수한 태초의 모습으로 거듭나 온 몸으로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사람들.
누드모델.
그들에게서는 역겨운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한 줌 천자락.
그들에게는 본심을 숨기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일 뿐이다.
프로 누드모델 하영은(한국누드모델협회 회장.30)씨.
누구보다 당당한 여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드모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떳떳히 밝힌
여자다.
그래서 누드모델이라는 그녀의 직업앞에 붙은 "프로"라는 낱말이 어색하지
않다.
"자신을 떳떳하게 누드모델이라고 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알몸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 누드모델이라 불려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가 있어 국내의 누드모델들은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지난 96년 그녀가 누드모델 협회를 창립하게 된 동기다.
협회가 생긴 이후 이제는 회원이 1백50명에 이를 정도로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세 소녀에서부터 60대 할머니까지.
전직 무용가 여대생 스튜어디스 에어로빅 강사 화가 등 출신도 각양각색
이다.
그녀는 지난 88년 한탄강 야외에서 "첫 경험"을 했다.
누드사진 촬영대회에 모인 사진작가들 앞에서 20살 알몸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던 것.
이후 11년째 누드모델이라는 외길을 걷고 있다.
1년을 채우기도 힘들다는 이 세계에서 10여년의 경력은 기록적이다.
대부분 중도에서 탈락하는 이유는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
몇 시간동안 한가지 포즈를 취한다는 것은 실제로 막노동보다도 몇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여기에 누드모델에 대한 사회의 손가락질도 큰 부담이다.
이 때문에 아직도 5백명 이상의 누드모델이 그늘 속에 머물러 있다.
그녀가 누드모델의 길로 들어서게 된데는 지난 88년 길거리에서 만난 한
강도의 역할이 컸다.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모은 19만원을 길거리에서 몽땅 날치기당한 것.
고향인 광주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혼자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던 때였다.
날치기를 당하고 땡전 한푼 없어지자 이상하게도 문득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이 떠올랐다.
그 길로 생활을 위해 무작정 누드모델로 나서게 됐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일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껏 후회해 본
적도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사주를 볼때마다 누드모델이 천직이라는 점괘가 족집게처럼
나온단다.
하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남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못할 정도의
숙맥이었다.
"몸이 매끈하고 미모가 받쳐준다고 누구나 최고의 누드모델이 되는 게
아니예요"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등 예술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것.
그녀가 설명하는 최고의 누드모델이 갖춰야 할 기본 요건이다.
그녀의 활동 영역을 보면 절로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오페라(라보엠) 뮤지컬(인어공주) 영화(사랑의 종합병원) 연극(욕탕속의
여인들)을 비롯 퍼포먼스 CF모델 카다로그모델 등 그녀의 활동 분야는 끝이
없다.
만인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알몸일때 더 자유롭다고 한다.
하나의 주제를 온 몸을 불살라 표현하는 것.
마음과 육체가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최고의 누드모델이라면 "바른 인간성"을 갖춰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롯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마음이 몸을 통해 저절로 발산된단다.
지망생은 많아도 이런 조건들을 갖춘 적격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지금껏 1천명이 넘는 사람이 협회문을 두드렸으나 이중 5% 가량만
누드모델이 될 수 있었다.
겉으로 당당하기만한 그녀에게도 한가지 가슴아픈 비밀이 있다.
아직도 박형란이라는 본명을 떳떳하게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칠순이 넘은 부모님 때문이다.
지금도 집에 갈때는 화장도 못하고 짧은 치마는 입지 못할 정도로 완고
하단다.
그러니 부모님 앞에서 만큼은 지금도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을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한다.
"은퇴는 없습니다. 내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라면 몰라도..."
누드모델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지는 세상.
가장 꾸밈없는 모습으로 일궈 내려는 그녀만의 유토피아다.
< 류성 기자 star@ >
** 제보접수 : powerpro@ked.co.kr
-----------------------------------------------------------------------
[ 제2부 "아름다움을 캐는 사람들" 글 실은 순서 ]
1. 총론 2. CI(기업이미지통일)전문가
3. 큐레이터 4. 패션 디자이너
5. 캐릭터 디자이너 6. 비주얼 머천다이저
7. 애니메이터 8. 카 디자이너
9. 인테리어 디자이너 10. 화폐 디자이너
11. 일러스트레이터 12. 북 디자이너
13. 카드 디자이너 14. 패션 모델
15. 서체 디자이너 16. 복제미술가
17. 인테리어자재 디자이너 18. 공간디자이너
19. MD(머천다이저) 20. 누드모델
다음회부터 제3부 "돈과 데이터의 승부사들"로 이어집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6일자 ).
사람들.
누드모델.
그들에게서는 역겨운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한 줌 천자락.
그들에게는 본심을 숨기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일 뿐이다.
프로 누드모델 하영은(한국누드모델협회 회장.30)씨.
누구보다 당당한 여자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누드모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떳떳히 밝힌
여자다.
그래서 누드모델이라는 그녀의 직업앞에 붙은 "프로"라는 낱말이 어색하지
않다.
"자신을 떳떳하게 누드모델이라고 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알몸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 누드모델이라 불려질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가 있어 국내의 누드모델들은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지난 96년 그녀가 누드모델 협회를 창립하게 된 동기다.
협회가 생긴 이후 이제는 회원이 1백50명에 이를 정도로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세 소녀에서부터 60대 할머니까지.
전직 무용가 여대생 스튜어디스 에어로빅 강사 화가 등 출신도 각양각색
이다.
그녀는 지난 88년 한탄강 야외에서 "첫 경험"을 했다.
누드사진 촬영대회에 모인 사진작가들 앞에서 20살 알몸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던 것.
이후 11년째 누드모델이라는 외길을 걷고 있다.
1년을 채우기도 힘들다는 이 세계에서 10여년의 경력은 기록적이다.
대부분 중도에서 탈락하는 이유는 엄청난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
몇 시간동안 한가지 포즈를 취한다는 것은 실제로 막노동보다도 몇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여기에 누드모델에 대한 사회의 손가락질도 큰 부담이다.
이 때문에 아직도 5백명 이상의 누드모델이 그늘 속에 머물러 있다.
그녀가 누드모델의 길로 들어서게 된데는 지난 88년 길거리에서 만난 한
강도의 역할이 컸다.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모은 19만원을 길거리에서 몽땅 날치기당한 것.
고향인 광주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혼자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던 때였다.
날치기를 당하고 땡전 한푼 없어지자 이상하게도 문득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이 떠올랐다.
그 길로 생활을 위해 무작정 누드모델로 나서게 됐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일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껏 후회해 본
적도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사주를 볼때마다 누드모델이 천직이라는 점괘가 족집게처럼
나온단다.
하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남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못할 정도의
숙맥이었다.
"몸이 매끈하고 미모가 받쳐준다고 누구나 최고의 누드모델이 되는 게
아니예요"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등 예술분야를 두루 섭렵하는 것.
그녀가 설명하는 최고의 누드모델이 갖춰야 할 기본 요건이다.
그녀의 활동 영역을 보면 절로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오페라(라보엠) 뮤지컬(인어공주) 영화(사랑의 종합병원) 연극(욕탕속의
여인들)을 비롯 퍼포먼스 CF모델 카다로그모델 등 그녀의 활동 분야는 끝이
없다.
만인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알몸일때 더 자유롭다고 한다.
하나의 주제를 온 몸을 불살라 표현하는 것.
마음과 육체가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최고의 누드모델이라면 "바른 인간성"을 갖춰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롯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마음이 몸을 통해 저절로 발산된단다.
지망생은 많아도 이런 조건들을 갖춘 적격자는 찾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지금껏 1천명이 넘는 사람이 협회문을 두드렸으나 이중 5% 가량만
누드모델이 될 수 있었다.
겉으로 당당하기만한 그녀에게도 한가지 가슴아픈 비밀이 있다.
아직도 박형란이라는 본명을 떳떳하게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칠순이 넘은 부모님 때문이다.
지금도 집에 갈때는 화장도 못하고 짧은 치마는 입지 못할 정도로 완고
하단다.
그러니 부모님 앞에서 만큼은 지금도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을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한다.
"은퇴는 없습니다. 내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라면 몰라도..."
누드모델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지는 세상.
가장 꾸밈없는 모습으로 일궈 내려는 그녀만의 유토피아다.
< 류성 기자 star@ >
** 제보접수 : powerpro@ked.co.kr
-----------------------------------------------------------------------
[ 제2부 "아름다움을 캐는 사람들" 글 실은 순서 ]
1. 총론 2. CI(기업이미지통일)전문가
3. 큐레이터 4. 패션 디자이너
5. 캐릭터 디자이너 6. 비주얼 머천다이저
7. 애니메이터 8. 카 디자이너
9. 인테리어 디자이너 10. 화폐 디자이너
11. 일러스트레이터 12. 북 디자이너
13. 카드 디자이너 14. 패션 모델
15. 서체 디자이너 16. 복제미술가
17. 인테리어자재 디자이너 18. 공간디자이너
19. MD(머천다이저) 20. 누드모델
다음회부터 제3부 "돈과 데이터의 승부사들"로 이어집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