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가을 평양의 숭실학교 초청으로 경성의 황성기독교청년회팀이
평양서 열린 축구시합은 흥미롭다.

공은 8호를 사용했고 심판은 주최측이 임의로 선정했다.

골문은 막대기 두개를 세워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수가 핸드링반칙을 범해도 심판이 휘슬을 부는 것은 마음대로 였다.

심판이 이러하니 선수끼리 치고 받는 싸움이 잦았다.

숭실중학 교장과 황성기독교청년회 총무가 게임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관중들 앞에 나와 "두 팀안에 마귀가 숨어있어 시비가 잦다.

모두 머리숙여 기도하자"고 권했다.

처음에 어리둥절하던 선수와 관중들도 이에 따랐다.

기도가 선수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는지 경기는 다시 속개됐고 숭실중학이
1골을 넣고 승리했다.

축구협회의 "한국축구백년사"에 있다.

승부욕이 오죽했으면 기도로 열기를 시켰겠는가만은 심판판정도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다.

우리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한 경평축구전도 실은 판정문제와 지역감정이
겹쳐 4회대회후 중단됐다.

양 축구단은 1933년 4월 6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첫 대회를 열고
3번시합에 1승1무1패를 기록했다.

그해 가을 같은 곳에서 치룬 2회대회는 3전3무로 끝났다.

3회대회(34년)는 서울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었는데 경성팀이 2전1무1패로
졌다.

다음해 4월 경성운동장서 4회대회가 열렸다.

1차전 양팀은 초반부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두팀 모두 어느때보다 훈련량이 많았음이 명백했지만 0:0으로 비겼다.

2차전도 한치의 양보없이 격전이 계속됐다.

그러다 경성이 귀중한 선제골을 넣었으나 업사이드 판정이 내려져
이에대한 시비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경기가 중단됐다.

그러나 다행히 양팀간 타협이 이뤄져 무득점으로 처리됐고 경기는
재개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평양이 역습으로 귀중한 승리골을 터뜨려 1:0으로
경기를 매듭지었다.

서울시장이 지난 6일 서울월드컵경기장 기공식서 평양시장에게
경평축구의 부활을 제의했다.

예전 경평전은 미흡한 경기장시설, 미숙한 판정, 승부욕등이 겹쳐 과열을
불러왔으나 앞으로는 열기는 민족화합쪽으로 모으고 대항전을 펴면 걱정할
게 없다.

평양측의 응답이 기대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