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지식자원의 빈곤..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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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RICWS@seri-samsung.org >
IMF사태의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지식자원의 빈곤에서도 접근
이 가능하다.
IMF사태가 오게 된 분위기, IMF행이 결정되고 나서의 대외교섭, 그후의 정책
선택과정에서 지식자원의 얇음이 생생히 드러났다.
그때문에 실제 당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당했고 고통도 더 컸다.
경제위기의 탈출로를 못 찾고 미로를 헤매면서 경제연구소를 비롯한 우리나
라 지식자원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다.
그것을 나라수준이나 국운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슬픈 일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가맹국이며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비해선 지식축적이
너무 적다.
이것은 빌려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단시일 내에 축적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
에 더욱 걱정스럽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가 사회분위기이고 둘째가 실제적 지식의 결핍이다.
우선 사회분위기가 합리적, 이성적이지 못하다.
몇년전 쌀개방 논의 때나 작년 기아사태 및 IMF 재협상론이 나왔을 때 사회
분위기를 상기해 보라.
IMF사태도 지극히 감정적, 계산적으로 본다.
스스로의 잘못은 없고 남의 탓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냉철한 원인분석이
어렵다.
거기다 정치적 이해와 마녀재판적 열기가 얽혀있다.
IMF사태가 온 것은 크든 적든 많은 사람들이 한몫씩을 했다.
대다수가 붕 떠서 가불해 살았기 때문에 그 계산서가 한꺼번에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걸 부인하고 희생양을 찾는다.
IMF사태에 대해 스스로의 귀책을 인정않기 때문에 계산서의 분담도 거부한다
총론적으로 그렇게 강조되던 고통분담이 막상 각론단계에 들어가자 곳곳에서
마찰과 갈등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또 이런 분위기 때문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조처가 어렵다.
요즘의 경제위기는 미증유의 것이기 때문에 미증유의 결단과 조처가 필요하
다.
더 큰 코스트를 줄이기 위해선 당장의 코스트는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납득하는 사회분위기가 아니다.
통과외례와 절차가 너무 비싸고 복잡하다.
또 그걸 강행돌파할 지도력도 없다.
지도력도 지적자산의 하나라 볼 수 있다면 그 축적이 너무 얇은 것이다.
두번째로 실제 지식면의 한계는 갈수록 실감되고 있다.
사회과학, 그중에서도 경제분야에서 더욱 그렇다.
IMF사태가 오기까지의 둔감 상태는 그렇다고 치자.
우리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도 작년 10월까지 한국경제를 낙관했고 요즘 서슬 푸른 무디스 등 신용
평가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그후가 문제였다.
워낙 엉겁결에 당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태파악조차 어려웠다.
한국체질에는 맞지 않는 IMF경제처방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휴유증을 인식하고 고치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월가의 시장경제론에 압도되어 한국적 경제학이 맥을 못췄던 것이다.
그통에 신용붕괴와 경제의 오버킬(over-kill)이라는 대가를 치뤘다.
미증유의 경제사탱 대한 실질적 지식이 너무 얇았던 것이다.
지금도 IMF사태에 대한 준엄한 해석과 평론만 요란할뿐 활로에 대한 창조적
비전은 아직 없다.
평소 척박했던 학문풍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줄줄이 닥칠 경제파동 속에서 얼마나 더 당황하고 헤매야 할지 아득
하다.
IMF 등 대외협상 과정에서 이론적 뒷받침의 부족 때문에 손해본 것도 많을
것이다.
급한 김에 그랬지만 외채를 빌려준 측의 모럴해저드는 하나도 따지지 못했다
각종 외채를 국가보증으로 바꾸면서 이자도 더 얹어주었다.
국제통화시스템의 취약성이나 단기자본의 횡포는 놔둔채 모든 것을 한국의
잘못으로 떠 안아 몽땅 뒤집어 쓴 것이다.
좀더 탄탄한 지식 축적과 냉철한 사회분위기였으면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외채는 공식집계된 것만 1천5백억달러를 넘는데 이 많은 외채를 과연
그렇게 높은 금리를 주고 굴려갈 수 있을까.
전반적 부채재조정이나 탕감이 절실하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어도 경제학계에선 그걸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안으로만 야단치고 설교할게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아쉽다.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 버금가는 "한국외채의 경제적 귀결"은
언제쯤 나올 것인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3일자 ).
IMF사태의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지식자원의 빈곤에서도 접근
이 가능하다.
IMF사태가 오게 된 분위기, IMF행이 결정되고 나서의 대외교섭, 그후의 정책
선택과정에서 지식자원의 얇음이 생생히 드러났다.
그때문에 실제 당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당했고 고통도 더 컸다.
경제위기의 탈출로를 못 찾고 미로를 헤매면서 경제연구소를 비롯한 우리나
라 지식자원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다.
그것을 나라수준이나 국운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슬픈 일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가맹국이며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비해선 지식축적이
너무 적다.
이것은 빌려 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단시일 내에 축적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
에 더욱 걱정스럽다.
이렇게 된 원인은 첫째가 사회분위기이고 둘째가 실제적 지식의 결핍이다.
우선 사회분위기가 합리적, 이성적이지 못하다.
몇년전 쌀개방 논의 때나 작년 기아사태 및 IMF 재협상론이 나왔을 때 사회
분위기를 상기해 보라.
IMF사태도 지극히 감정적, 계산적으로 본다.
스스로의 잘못은 없고 남의 탓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냉철한 원인분석이
어렵다.
거기다 정치적 이해와 마녀재판적 열기가 얽혀있다.
IMF사태가 온 것은 크든 적든 많은 사람들이 한몫씩을 했다.
대다수가 붕 떠서 가불해 살았기 때문에 그 계산서가 한꺼번에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걸 부인하고 희생양을 찾는다.
IMF사태에 대해 스스로의 귀책을 인정않기 때문에 계산서의 분담도 거부한다
총론적으로 그렇게 강조되던 고통분담이 막상 각론단계에 들어가자 곳곳에서
마찰과 갈등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또 이런 분위기 때문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조처가 어렵다.
요즘의 경제위기는 미증유의 것이기 때문에 미증유의 결단과 조처가 필요하
다.
더 큰 코스트를 줄이기 위해선 당장의 코스트는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납득하는 사회분위기가 아니다.
통과외례와 절차가 너무 비싸고 복잡하다.
또 그걸 강행돌파할 지도력도 없다.
지도력도 지적자산의 하나라 볼 수 있다면 그 축적이 너무 얇은 것이다.
두번째로 실제 지식면의 한계는 갈수록 실감되고 있다.
사회과학, 그중에서도 경제분야에서 더욱 그렇다.
IMF사태가 오기까지의 둔감 상태는 그렇다고 치자.
우리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도 작년 10월까지 한국경제를 낙관했고 요즘 서슬 푸른 무디스 등 신용
평가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그후가 문제였다.
워낙 엉겁결에 당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태파악조차 어려웠다.
한국체질에는 맞지 않는 IMF경제처방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휴유증을 인식하고 고치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월가의 시장경제론에 압도되어 한국적 경제학이 맥을 못췄던 것이다.
그통에 신용붕괴와 경제의 오버킬(over-kill)이라는 대가를 치뤘다.
미증유의 경제사탱 대한 실질적 지식이 너무 얇았던 것이다.
지금도 IMF사태에 대한 준엄한 해석과 평론만 요란할뿐 활로에 대한 창조적
비전은 아직 없다.
평소 척박했던 학문풍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줄줄이 닥칠 경제파동 속에서 얼마나 더 당황하고 헤매야 할지 아득
하다.
IMF 등 대외협상 과정에서 이론적 뒷받침의 부족 때문에 손해본 것도 많을
것이다.
급한 김에 그랬지만 외채를 빌려준 측의 모럴해저드는 하나도 따지지 못했다
각종 외채를 국가보증으로 바꾸면서 이자도 더 얹어주었다.
국제통화시스템의 취약성이나 단기자본의 횡포는 놔둔채 모든 것을 한국의
잘못으로 떠 안아 몽땅 뒤집어 쓴 것이다.
좀더 탄탄한 지식 축적과 냉철한 사회분위기였으면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외채는 공식집계된 것만 1천5백억달러를 넘는데 이 많은 외채를 과연
그렇게 높은 금리를 주고 굴려갈 수 있을까.
전반적 부채재조정이나 탕감이 절실하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어도 경제학계에선 그걸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안으로만 야단치고 설교할게 아니라 밖을 향해서도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아쉽다.
케인스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 버금가는 "한국외채의 경제적 귀결"은
언제쯤 나올 것인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