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숙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kslee@knua.ac.kr >

거창한 생각도 좋지만 조그마한 생각이 나라발전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건강관계로 피검사를 자주 해야할 때가 있었다.

피를 뽑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대 병원에 있는 채혈실로 간 일이 여러번
있었다.

채혈실 앞에 가면 피를 뽑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피를 뽑는 간호원들의 출근시간은 9시인 것같다.

나는 긴줄에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9시 훨씬 전에 채혈실로 갔다.

일찍 가서 제일 앞에 줄서고 싶어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내마음과 같은 모양이었다.

아침 9시30분께 채혈실 앞으로 가보아도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냥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 입씨름을 한다.

"여보시오. 늦게 온 사람이 왜 앞자리에 서려고 하시오. 온 순서대로 줄을
서시오"라고 누가 말한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내가 8시에 왔다가 잠깐 볼일 보러갔다가 오는 길이오.
내자리는 제일 앞이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줄 제일 앞에 가서 선다.

입씨름은 끝없이 계속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싸움까지 벌어진다.

채혈실앞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병원측에서 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않는가 싶었다.

미국에서 교육학공부를 할 때 "텔링 이즈 낫 티칭(Telling is not teaching)
"이라는 경구를 들은적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을
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자식이나 학생들은 그 말대로 하지않는다.

"말을 한다고 해서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경구가 이때문에 생겼다.

"공중도덕을 지키시오, 줄을 서시오, 차선을 지키시오, 쓰레기를 아무 곳에
나 버리지마시오"라는 식의 말은 있지만 그말의 효과는 발생되지 않는다.

"환자들은 온 순서대로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리십시오"라고 채혈실 문앞에
써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어느 하루 채혈실 앞으로 갔더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채혈실 앞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나는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채혈실앞에 번호표를 뽑는 작은 기계 하나가 준비돼 있었다.

환자들은 채혈실앞에 오는 즉시 번호표를 뽑았고 자기 번호가 되면 채혈을
하게끔 돼 있었다.

작은 기계장치 하나의 설치가 입씨름을 없앴고 질서를 잡았다.

병원도 환자도 모두 행복했다.

이성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거창한 말보다 작은 장치하나가 채혈실앞의 문제
를 해결했다.

미니 아이디어가 놀라운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다.

아이들의 정신과 육체발달에 음악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미국에서
대두되었을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음악교실에서 아동들을 상대로 음악교육을 실시할 때 음악교사들이
면 유행처럼 누구나 수행하는 학습활동이 하나있었다.

아동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면서 음악에 맞추어 교실안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학습활동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러아이들이 마음대로 움직이다 보니 교실안은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음악교육잡지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니 아이디어공모전을 가졌다.

어느 시골초등학교 음악선생의 미니 아이디어가 당선됐고 그 미니 아이디어
덕분에 문제는 해결됐다.

당선자의 아이디어는 아동들에게 자동차 운전사역할을 시켰던 것이다.

즉 "아동들은 모두가 멋진 자동차의 소유자로 상상하라, 음악을 들으면서
자동차운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교실안에서 자동차사고를 내지않게
하면서 움직여라"는 것이었다.

아동들의 자동차운전에 대한 흥미가 교실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해결책은 구멍에 맞는 열쇠의 발견에 있는 것이지 효력이 없는 말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겐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있다.

교통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 신뢰성회복의 문제 등 수없이 많은 사회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말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안다.

거창한, 좋은 말은 이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거창한 아이디어도 좋지만 나는 미니 아이디어가 세상을 보다 환하고 밝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믿는다.

채혈실앞 번호표가 채혈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동차 운전사역할이라는
아이디어가 아이들 문제를 해결했다.

주위의 조그만 것이라도 개선해보겠다는 아이디어가 조금씩 더 나아지는
삶을 영위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