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햇살에 잘 익은 모과 향기가 번지는 곳.

경기도 이천 마장면 장암2리.

작가 이문열(50)씨는 이곳 "부악문원"에서 대하소설 "변경"의 마지막 원고를
붙들고 씨름중이다.

원고지 1만4천장 가운데 남은 분량은 1백여장.

이것만 완성하면 25일까지 열두권으로 완간된다.(문학과지성사)

"워낙 방대해 내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사유
중에서 문학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30년 문학이력에서 터득한
기교를 아낌없이 다 썼지요"

이 작품은 전후 혼란기인 59년 봄부터 72년 유신 전야까지의 역사를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주인공의 가족사와 함께 복원하고 있다.

명훈 영희 인철 세 오누이를 통해 사회변혁기의 "뿌리뽑힌 자"들이 겪는
좌절과 고뇌를 그린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벽화"다.

도시빈민과 기층민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다 좌절하는 명훈, 알몸을
밑천으로 수직상승을 꾀하는 천민 자본주의의 상징 영희, 어느 쪽에도 편입
되기를 거부하고 "문학"을 선택하는 인철 등 세 가지 축이 작품을 끌고 간다.

"유신 이전까지를 다룬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토착적 민주주의
라는 말로 독재가 강화되고 북쪽에서는 주체적 사회주의로 세습이 이뤄졌지요
남북이 자기 주장만을 강요하면서 변경의 비극적인 상황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20세기 최후의 대하소설"(문학평론가 김병익)인 "변경"에 깊은 애착을
보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원고지 5천장을 넘지 않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서구에서 "고요한 돈강"이후 대하소설이 사라진 것도 시대에 뒤진 비효율적
이야기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회가 되면 세계사적으로도 유난히 특이했던 우리의 80년대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지난 10월 "황제를 위하여" 출간 때문에 파리에 갔다가 문학적 왜소함
에 쇼크를 받았다.

올해 초 뉴욕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국문학도 우리끼리만 폼잡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이젠 기획단계부터 영미문학권을 본격적으로 겨냥하는 작품을 쓸 참이다.

예전처럼 국내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뒤 외국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외국인
정서에 부합하는 작품을 "큰 바닥"에서 먼저 내고 이를 토대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요량이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평역 "삼국지"를 제외하고도 8백80여만부나 팔렸다.

"변경"이 10만질(1백20만부)만 나가도 순수창작 1천만부 판매기록을 달성
하게 된다.

가을휴식인 "추안거"에 들어간 부악문원에는 최근 심야전력을 이용한 전기
보일러가 설치됐다.

올 겨울 눈덮인 설봉에서 불어 올 이문열 문학의 훈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
들의 마음을 데워줄지 기대된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