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인협회의 외자도입 추진 ]

단체 이름까지 바꾸면서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취임한 이병철 회장의
의욕은 대단했다.

이 회장이 당면과제로 삼았던 건 세가지다.

첫째 협회 이미지 혁신문제, 둘째 군사정부와의 관계 정립, 그리고 경제인
협회가 지향할 최대 역점사업을 정하는 것 등이었다.

협회 이미지 혁신문제는 경제인협회로서는 시급한 과제였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61년초 출범했다가 쿠데타 때문에 문을 닫은 한국경제협의회 수준을 목표로
삼았지만 우선 회원수가 너무 적었다.

경제협의회는 70여명이 넘는 회원으로 경제계의 대동단결을 대내외에 과시
했었다.

회원수뿐만 아니라 회원 개개인을 보더라도 경제협의회와는 비교가 안됐다.

천재적 사업가로 당시 이름을 날린 이병철 회장 자신도 연령이나 경륜에서
경제협의회 당시의 김연수 회장(삼양사)을 따를 수 없었다.

이 회장은 회원수를 단시일내에 늘릴 수 없는 만큼 우선 부회장단을 제대로
꾸며 경제단체 이미지를 혁신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부회장인 조성철씨 외에 부회장을 2명 더 두기로 했다.

이 회장은 대한상의의 회장을 맡고 있던 송대순씨와 국제경제와 경험이
풍부한 극동해운 남궁련 사장에게 부회장을 맡기기로 했다.

송대순씨를 부회장으로 영입한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상의도 당시 회장단의 수난기였다.

5.16 직후 구데타 모의에 가담한 남상수(타워호텔 건설자) 사장이 잠시
회장으로 있다가 부정축재 조사에 연류돼 그만 두게됐다.

이어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 회원들의 지지와 기대 속에 회장에 취임했지만
소위 "반혁명 음모 사건"에 몰려 1주일도 못돼 물러났다.

회장이 공백 상태로 있게 되자 이병철 회장이 겸임하는 방안까지 나오기도
했었다.

이 회장은 그러나 자유당 말기에 대한상의회장을 지낸 송대순씨를 다시
상의회장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에게 경제인협회 부회장까지 맡긴 것이다.

이로써 경제인협회가 대한상의와 긴밀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경제계에서의
위상을 높여가게 됐다.

송 회장의 부회장 영입은 또 앞으로 경제발전이 본격화될 때 대.중소기업이
유기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 회장의 장기구상에서 나온 카드였다.

다음은 군사정부와의 관계 정립 문제.

이미 이 회장은 61년 5월27일 박정희와 독대했었다.

박정희는 당시 경제건설에 기업인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이병철의 의견을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용했다.

이 회장은 이 독대 이후로 박정희와는 경제에 관해서는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경제면에서 있어서는 주도권을 경제계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매사에 있어서 "제일주의"를 고집해 타인에게 뒤지는 것을 생리적으로
거역하는 이 회장은 적어도 경제면에 있어서는 정부를 리드 하도록 경제인
협회의 위상을 높여야겠다고 작심했다.

군사쿠데타 직후 누구도 엄두도 못낼 파격적인 생각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정부를 리드할 것인가.

"군사정부가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경제발전 방향과 전략에서 돌파구를 제시
하자.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보여주자"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 돌파구가 외자도입에 의한 공장건설 재원조달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자연히 경제인협회가 최대 역점 사업이 정해진 셈이다.

부회장 3인으로 회장단을 구성한 이 회장은 매주 한 번 이상 박정희 최고
회의의장과 접촉했다.

부정축재법에 의해 정해진 기간산업건설을 위한 여건과 지원체제 마련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경제인협회 회장단은 이미 제출한 "기간산업 건설계획안"을 앞에 놓고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박정희는 역시 돈이 걱정인 모양이었다.

그는 제철공장 건설만해도 1억3천만달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부보유불
(달러)를 전부 투입해도 부족할 정도가 아니냐며 고개를 저었다.

이 회장, 남궁 부회장 등은 지난 수년간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외자도입교섭 경험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자체를 "미국 원조 30억달러를 탕진한 국제 거지"로 비하
하고 있던 군사정부 주체들은 좀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 회장과 남궁 부회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가 외자도입과 여건조성에
관한 설명을 거듭했다.

대안이 없었던 박정희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고백대로 "경제에 무식한" 박정희(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62쪽)가
점차 경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이병철과 남궁련은 61년9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산업회의에
박정희 승인을 얻어 참석했다.

이 국제회의는 세계 유력한 기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사업을 논하는 자리였다.

이병철, 남궁련씨가 이 회의에 참석해 외자유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우리
경제인들이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뜻있는 출발점이었다.

경제인협회는 9월 13일 5개년계획에 소요되는 민간외자도입추진 계획을
마련해 최고회의에 건의했다.

18일에는 회장단이 박정희와 "당면 경제 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이란 회의를
가졌다.

드디어 제1차 민간외자도입 교섭단이 만들어졌다.

미주지역은 이병철이 단장, 송대순이 부단장이었다.

구주(유럽)지역엔 이정림 단장을 필두로 한 기업이들이 떠났다.

경제는 기업인들이 책임지고 리드해 보겠다는 의지와 기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