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는 예언자의 시대이다.

서양에서는 인류멸망의 날을 점지한 노스트라다무스가 활동했으며
동양에서는 남사고선생이 맹위를 떨쳤다.

남사고 선생은 조선 중종 4년(1509) 울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 호는 격암이다.

어렸을 때 인연이 있어 도승으로부터 역학비법을 전수 받고 잡과시험에
응시하여 종9품 벼슬을 얻었다.

선조때에는 관상감의 천문교수(종6품에 해당)를 지냈다.

천문을 이용한 예언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선조 8년의 동서분당과 그후의 임진왜란 등을 명종 말기에 벌써 예언했다고
한다.

앞날을 예지할 수 있는 능력자일수록 후천적 발복의 수단을 다양하게
강구하기 마련이다.

한소식(깨달음) 크게 얻어 구름과 달을 벗삼아 살아가는 절대적 구도자들
에게는 부귀공명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장삼이사 일반인들에게 있어
출세는 삶의 지향점이 될 수 있다.

큰 도학자였던 남선생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셨나보다.

부친의 산소를 천하명당에 모셔 효도도 하고 자신은 물론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결심을 했다.

고향인 울진을 중심으로 하여 주야로 명혈을 뒤지며 명당이라고 생각되는
자리를 찾았다.

산소를 쓰고 보니 푸른 용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던 장소로 알았던 자리가
독수리가 개구리 한 마리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자리였다.

다른 자리에 이장하고 몇년 뒤, 금빛나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날개부러진 닭이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는 자리로 판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아홉번까지 진행되어 결국 명당이라고 이름 붙여질만한 자리는
그의 차지가 되지 못했다.

그는 1709년(숙종 35) 울진의 향사에 배향되었다.

남사고비결과 격암유록이 그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몇몇 유명한 술객들과 종교인들에 의해 격암유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출판되어 있다.

항간에는 종교의 전파를 위한 위서가 아니냐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남사고 선생의 위치는 역학계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만하다.

성철재 <충남대 언어학과교수/역학연구가 cjseong@hanbat.chungnam.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