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를 하지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주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혹 시간이나 장소는 잊어버린다해도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었다
는 것은 반드시 기억한다.

그 속에는 언젠가는 그만큼 "받아야 한다"는 기대심리가 자리잡고 있다.

"돈빌린 사람은 잊어도 돈 꾸어준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속담도
여기서 나왔다.

세속에서는 이처럼 주고 받는 거래를 약삭빠르게 잘하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받을줄 모르고 주기만 하는 "바보윤리"를 "보시"라고 해서
가장 훌륭한 미덕으로 꼽는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준다"고 할때 우선 내가 주었다는 생각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도,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도 깡그리 잊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잊어야 집착이 생기지 않고 그래야 탐욕이 사라진다는 논리다.

불교 구휼의 모럴은 이런 "청정보시행"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서구적 교훈보다 더 철저한
것이 보시행이다.

정부가 겨울방학을 맞는 결식학생 13만여명에게 50일동안 "점심쿠폰"을
지급키로 했다는 소식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지정된 장소에서 주.부식을 타다가 밥을 해 먹거나 인근 식당, 학교급식시설
을 이용하도록 할 계획이란다.

그런데 확보된 민간지원금과 정부예산을 그대로 현금으로 지급하면 되는
일일텐데 왜 번거롭게 쿠폰을 발행해야 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급식학생의 대부분인 12~16세까지는 구속이나 간섭을 싫어하고 반항적인
경향으로 치닫는 사춘기 청소년들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이들에게 꼭 쿠폰을 지급해 결식학생임을
공개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여기까지 왔다가 쪽팔려서 돌아갔어요"

급식소 문전까지 왔던 한 고교생이 실토한 말은 무엇보다 구휼대상의
인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거래가 아닌 구휼의 기본적 모럴이기도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