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교수. 경제학 >

어린 시절 옛이야기 가운데 도깨비 방망이처럼 신기한 게 없다.

"돈 나와라 뚝딱" 외우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한편 가장 가슴을 조이던 것은 산 고개 넘어가다 호랑이를 만난 꼬부랑
할머니 얘기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가 몇번이나 되풀이되고, 결국 호랑이가
할머니로 변장하고 어린 남매를 잡아먹으려고 초가삼간 오두막집에 당도한다.

98년 초겨울 듣고 싶은 전래동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도깨비 방망이일 것이다.

당면한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앞길에 굽이굽이 넘어야 할 고비가 도사리고 있는 형국이다.

희망과 현실이 엇갈린다.

지난 9월에 이어 10월중에도 생산 출하 재고 등 각종 경기지표가 호전된
모습을 보였다.

제조업 가동률은 8월의 62.9%를 저점으로 9월 70.0%, 10월에는 67.6%로
오름세를 타고 있다.

10월에 낀 추석휴가 요인을 감안하면 가동률이 9월보다 10월에 오른 것으로
풀이된다는 통계청 발표다.

역시 계절적 요인 때문에 9월보다 소폭이지만 10월에도 경상수지가 27억5천
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래저래 반년 후 경기를 점치는 경기선행지수가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경미한 증가세(0.7%)로 돌아서 내년 상반기에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세로
돌아서 연평균 GDP성장률 2%를 예상하는 정부의 거시경제전망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정부의 도깨비 방망이가 또 한번 뚝딱 소리를 내면 5대 재벌의 빅딜인지,
구조조정인지도 매듭지어질 것이고, 그러면 올해 겨울은 라니냐 현상의
여파로 매서울 것이라는 기상예보와 달리 앞당겨 따스한 경제의 봄을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벌써 다층구조의 경제위기를 망각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피는 외환위기이지만, 그것은 바로 금융위기와 접하고
있다.

금융위기는 다시 방만한 기업경영과 전투적 노동운동으로 빚어진 실물경제
위기와 연결되고, 이것은 또 관료조직 및 정치권과 밀착되어 있다.

기득권한,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 득표수를 노린 인기영합적 정치노선이
연결고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묵인하는 "한국적" 문화풍토가 밑바닥 구조이다.

그러면 IMF사태이후 이제까지 어느 정도의 해결이 가닥이 잡힌 것은 어디
까지인가.

외환보유고는 아직 불안하지만 일단 숨돌릴 대목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금융부문 구조조정문제는 큰 가닥이 잡혀가지만 부실기관 및 채권정리 등이
남아있어 아직 첩첩산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짙고 짙은 안개속에서 하루하루 한 굽이씩 도산의 벼랑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 기업들이다.

"팔 하나 떼어주면 안 잡아먹지"를 넘기면 "다리 하나"를 더 달라는 호랑이
를 만나 몸통까지 바칠 위난을 맞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업들의 형세다.

문어발 대기업은 떼어줄 팔다리가 많다고 하지만 수익성 높은 몸통기업마저
정리하라는게 정부방침인 모양이다.

환란의 중요책임은 방만한 기업경영에 있다.

그러나 위기 이후 국민경제를 이끌어 갈 주체도 역시 기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대기업이 일부 업종에 투자한 과잉설비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설비규모의 적정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은 국내시장에 세계시장의
일정분을 합친 개념이어야 한다.

아마 이번에도 위기탈출의 계기는 해외부문에서 마련될 것이다.

다만 과거보다 해외부문의 도깨비 방망이 위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요즘 위기가 다소 물러간 듯한 분위기 속에서 위기의 주범인 관치금융이
다시 기지개를 펴는 모습이 보인다.

민간기업 뿐만 아니라 공기업 정부조직 정치권 모두 집단이기주의의 팔
다리를 잘라 호랑이 밥으로 삼는 결단이 요구된다.

호랑이를 수숫대에 못박고 해와 달이 되는 어린 남매의 슬기를 배워야
위기에서 벗어난다.

도깨비 방망이식 위기탈출에는 교훈이 없다.

한국인 모두 아직도 위기의 교훈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또 다른 유형의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