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업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감이다.
앞으로 누구도 기업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IMF 체제 1년을 거치며 한국의 기업가정신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강의 기적"을 견인해온 창업 정신과 도전 의식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설명이었다.

기업인들이 "환란의 주범"으로 몰리고 "정신 차리지 못한 집단"으로
매도되는 상황이 지난 1년간 계속되면서 기업들의 기는 꺾였다.

그 와중에 신속한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정부의 압박은 계속됐고 기업들은
1년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기업 구조조정의 득과 실 =기업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1년 내내 계속
됐다.

정부도 속도를 높이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경쟁력을 갖추고 다시 태어난 기업은 찾기 어렵고 아예
사라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어딘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기업들은 처음부터 금융구조조정이 먼저 돼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살기에 급급한 금융기관들이 돈을 거둬가 기업들은 연쇄
부도가 불가피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맞춰야 하는 은행들은 기존 대출을 회수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상당수 흑자기업들이 운영자금을 마련못해 쓰러졌다.

기업들의 지적이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반영되기는 커녕 구조조정을
피하려는 술책 정도로 지탄받았다.

이는 곧바로 비본질적인 구조조정으로 변질됐다.

예를 들어 그룹차원의 계열사 정리, 외자유치를 총괄할 조직인 기조실
비서실을 정부는 해체하라고 했다.

기업들은 그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곧 필요에 의해 대부분 구조조정본부를 다시 만들었다.

이름만 바꾼 것이다.

그룹회장이 법적 지위도 없으면서 권한을 행사한다는 정부의 지적이 있자
기업마다 총수들을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로 등재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내용보다 형식이 앞서는 구조조정이 상반기 내내 판을 친 것이다.

3대그룹간 대규모 사업을 맞교환하라는 소위 "빅딜"도 정치적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논의만 무성했을 뿐 성사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자금난은 가중됐다.

30대그룹의 절반 이상이 부도나 화의신청 등으로 좌초됐다.

성장기반을 담보할 선도기업들이 쓰러진 것이다.

<> 목표치 밑돈 외자유치 =정부가 환란극복의 유일한 대안으로 알고 있는
외자유치도 지난 1년간의 성과는 기대 이하다.

비교적 빨리 해외매각을 추진한 대상(라이신 사업) 한화(한화바스프우레판
한화기계) 한솔(한솔제지) 등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큰 건이 거의 없다.

5대그룹의 경우는 올들어 지난 10월까지 목표치의 19.3%인 56억달러를
유치하는데 그쳤다.

정부는 기업들이 아직도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렇다며 주력사를
팔라고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도 할 말이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상반기에만 30대그룹에서 2백여건의 합작 및 매각 협상이
진행됐지만 외국인들이 자꾸 협상을 늦추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고 설명
했다.

기업을 압박하는 정부의 정책 수위가 높아지면서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매물값이 떨어질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모 업체 관계자는 "좋은 사업이라며 파트너를 설득하고 있는데 정부가
나서서 중복.과잉업종이라고 지적하고 나서니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 선진경영은 배우고 있다 =IMF체제를 통해 우리 기업들이 타율적이나마
구조조정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분명 사실이다.

대주주 1인 중심의 경영 관행은 소액주주의 작은 권리까지 보호하는
선진형으로 바뀌었다.

외형 중시의 사고도 지속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수익성 중심으로 개선됐다.

계열사간 지원의 고리가 끊어져 그동안 적자 계열사를 살리느라고 스스로의
여력을 포기해온 일부 업체들은 오히려 경쟁력 강화의 호기를 맞았다.

그동안 외국인들로부터 수차례 지적받아온 경영의 불투명성도 어쨌든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최소한 경영방식에 관한한 글로벌스탠더드를 지향하고 있고 그것 자체가
미래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투자인 셈이다.

기업들은 계열사간 자금 연결고리를 끊는 상호지급보증해소, 재무구조
개선을 담보하는 부채비율 축소, 경영투명성을 제고하는 이사회 개편 등
제도를 충실히 지켜가는 것으로 기업부문 개혁은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정부의 할일 =기업들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하는 구조조정은
이렇다.

비교적 간단한 구도다.

우선 정부 간섭을 최소화한다.

대신 금융구조조정을 조기에 매듭짓는다.

그리고 금융기관과 각 기업이 자율적으로 협의해 구조조정을 하도록한다.

주거래은행들은 기업 사정을 정부보다 훨씬 잘 알 수 있다.

또 돈줄을 쥐고 있는 금융기관이 시키는 일이라면 기업들은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다.

몸집줄이기나 재무구조개선 등 목표도 달성하기 쉬어질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구조조정을 돕고 외자유치를 촉진할 수 있는 지원책 마련에
집중돼야 한다.

편견을 갖고 기업을 대함으로써 기업가 정신까지 말살하는 우를 더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인 것이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