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투자유치단의 활동 ]

61년11월2일 출발한 미주투자유치단(단장 이병철)활동내용은 유럽으로 간
구주지역투자유치단(단장 이정림)의 활동과 사뭇 같았다.

우선 미국경제계는 한국을 여전히 한국전쟁에 이은 무상원조대상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간차원의 차관교섭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0년대 후반부터 민간을 상대로 한 개발차관(DLF)이 시작됐으나 그 규모나
건수는 아주 미미했다.

둘째 민주당시절에 요청한 원조가 일부 집행되고 있었다.

장맨정부는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화의 준비단계로 실업구제와 "국토건설
사업"에 우선 총력을 기울였다.

장면총리는 국토건설사업 재원조달을 위해 5년간 연 천만달러의 추가원조를
미정부에 요청했고 그 일부가 받어들여진 상태였다.

이병철회장이 이끄는 미주투자유치단활동을 살펴보자.

유치단은 한국동란중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프리트장군의 열성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밴프리트장군은 퇴역했으나 미국 경제계에도 넓은 지면을 갖고 있어
많은 기업인들을 소개해줬다.

미국기업인들은 독일등과는 달리 구체적인 차관교섭에 앞서 한국이 갖추어야
할 투자환경조성에 대해 소상히 조언했다.

한국과 같이 후진국을 도우려는 그들 특유의 의협심이나,최대강국으로서의
그들나름의 사명감에서 였다고 할까.

미국기업인들의 공통된 조언은 1)외자유치에 의한 공업화를 하려면 수송.
용지확보등을 감안, 임해지역이나 내륙요지에 "특별 공업지구"를 먼저
설치해야한다.

이 공업지구선정은 수송 전력 교통 용수 노동력 공장용지등의 확보가능성
등이 면밀히 검토돼야 하고 총체적으로 국제경쟁력이 월등해야 한다.

2)외자도입법을 합리적으로 제정하고 이와 더불어 정치 경제 사회적조건을
투자가들에게 맞도록 개선해야 한다.

3)투자.차단기술제휴내용등 세밀히 구분하고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내용,
상환조건, 기업수지전망등을 상세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국내에서 외자도입에 선발주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이병철회장이나 남궁련
부회장등도 이때 미국기업인들에게서 겸허하게 배우기로 작심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인들의 제시조건에 대해 즉석에서 대안을 낼수가 없어 그들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귀국하는대로 당신들이 만족할수 있는 공업지대
를 선정해, 추진할 계획"이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결코 공허한것이 아니었다.

공업지구창설문제는 이미 한국경제협의회 시절에 그 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병철회장은 세계적 국모의 비료공장을, 남궁련부회장은 정유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적합한 용지물색을 위해 국내외 공업지대와 항구들을 주의깊게
살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독일의 라인강지대, 로테르담 안트호프 등 세계적 공업항구로 샅샅이
살폈다.

뿐만아니라 삼양사 김연수회장을 제당공장부지선정을 위해 한국해안지역을
직접 답사한 적이있다.

그래서 울산에는 이미 제당공장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해방후 울산을 공업지구 후보지로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김연수
회장이었던 셈이다.

이런 연유로 경제협의회는 당시 앞으로 본격적인 공장설립에 들어가면 울산
지대가 대규모 공업지구의 첫번째 후보지로 점찍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경제인들은 어느정도의 신빙성을 갖고 "공업지구"
설치를 약속했던 것이다.

이에대해 미국기업인들은 즉석에서 "당신들이 이런조건을 우선 만들어놓고
연락하면 우리는 투자사절단을 파견해 입지조건을 실지답사하겠다"고 대답
했다.

미국측은 그러면서도 미심적었던지 한국의 투자유치단을 위해 피츠버그와
디토론이트 공업지대사찰을 주선해줬다.

투자유치단일행은 미국측의 안내에 따라 공업지대를 시찰했다.

이들은 합작투자프로젝트협의에 필요한 준비사항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12월초순 귀국했다.

구체적 투자나 차관약속은 얻지 못했으나 일행은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미국측이 투자조사단 방한을 약속했고 한국측은 공업센터설립구상을 구체화
시킬 큰 계기를 확실히 마련했다.

12월16일 귀국 즉시 조선호텔에서 정부관계자를 비롯한 기업가, 중요인사들
을 초청해 교섭단보고회를 가졌다.

이어서 1월11일 이사회에서 울산공업센터건설에 대한 건의서를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엄청난 가속이 붙은 움직임이었다.

군사정부도 이에 뒤질세라 과단성있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우선 정부와 민관인 24명으로 구성되는 "울산공업도시 신설안에 대한
연구반"을 조직,경제인협회가 낸 계획안을 검토시켰다.

지금 내 앞에는 1962년1월5일 경제인협회사무국이 작성한 "울산공업센터
설립안"이 놓여 있다.

놀라울정도로 소상하고 구체적인 내용이다.

당시 김주인 사무국장은 이 계획작성을 위해 미국.일본의 자료들을 광범위
수집, 참고 했다고 지금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그럴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전 전경련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