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평가 분석사처럼 손님 입장이면서 큰소리 칠수 있는 직업은 드물
것이다.

이들은 주인(기업)의 눈치를 봐야하는 객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주인이란
존재를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주인들이 이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은 애교를 다 부려야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칫 이들의 눈 밖에 벗어나면 아무리 주인이라도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예의 없는 손님"인 신용평가 분석사란 어떤 사람들일까.

신용평가 분석가가 주인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파워는 바로 "살생부"로부터
나온다.

살생부는 신용평가 분석가가 내리는 각 기업의 신용등급이다.

신용평가 분석가로부터 투자적격 등급을 받으면 주인인 기업은 금융시장으로
부터 원할한 자금조달을 보장받는다.

반면 투기등급을 받으면 자금파이프가 막혀 생존이 불투명해지곤 한다.

때문에 이들로부터 더 나은 신용등급을 받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

한국신용정보의 오광희(41) 평가담당 이사는 기업들에겐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가르는 염라대왕과 비슷한 존재다.

일년에 그의 손을 거쳐 신용등급이 매겨지는 회사만 대략 6백여개가 넘는다.

그가 올들어 단기간에 가장 많은 기업신용 판정을 내린 것은 지난 5월.

각 은행마다 부실기업을 가려내기 위해 기업부실판정위원회를 구성했을
때다.

이때 한일 상업 외환등 3개 은행의 부실판정위원으로 선임돼 신용평가업계
인사중 가장 많은 활약을 했다.

64대 재벌그룹을 포함한 주요 기업들에 대한 신용평가 작업이 그의
임무였다.

한달 남짓동안 무려 1백개 업체의 살생부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살생부가 나중에 이들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판단기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객관적인 신용등급 평가를 위해선 공정성이 생명입니다".

만약 공정성을 저버리고 기업에 편향적인 등급을 내리게 되면 그것을 믿고
투자한 투자자는 큰 손실을 볼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신용평가 분석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가 신용평가 분석가는 "공인"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공인정신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한보그룹의 신용평가.

지난 94년부터 오 이사는 4차례에 걸쳐 주변의 분위기에도 게의치 않고
"한보그룹은 사업성이 불투명하다"라는 평가를 줄기차게 내렸던 것이다.

결국 이런 평가를 무시하고 거액을 대출해준 제일은행은 한보와 동반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는 기업이 제공하는 각종 데이터를 일단 의심부터 한다.

오로지 자신의 철저한 검증을 거친 데이터라야 믿음을 가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보다 나은 신용등급을 받기 위해 각종 경영자료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매달 기업 관계자를 50명 이상 만나고 틈나는 대로 공장을 방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인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기업들의 디폴트
(채무불이행)다.

자신이 투자 적격이라고 등급을 매긴 기업이 하루 아침에 도산하게 되면
신용평가 분석가로서의 신뢰성은 물거품이 된다.

특히 요즘같이 불경기일때는 신용평가를 하기가 가장 어렵단다.

"IMF체제 이후 기업부도가 속출하면서 신용평가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채권은 발행자가 부도가 나면 휴지조작이 된다는 사실을
투자자들이 경험을 통해 뒤늦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지요"

신용사회의 마지막 "파수꾼"이라고 자부하는 오 이사.

지난 29년 대공황을 거쳐 미국의 신용평가제도가 정착됐듯이 우리도 IMF
경기불황기를 맞아 신용평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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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 기자 sta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