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 < 미국 한국상공회의소 회장 >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진단과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은 국제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전문분석가(analyst)들이
아닌가 싶다.

이 분석가들은 소속 금융기관에 투자전략의 밑그림이 되는 최신자료를
수시로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분석 보고서는 전문적, 객관적, 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한국정부나 기업관계자들이 "프로 분석가"의 진단에 귀기울여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분석가들이 최근 한국에 대해 내놓고 있는 평가는 대동소이하다.

"구조 조정은 거시적으로 잘하고 있으나 미시적인 부분, 즉 집행
(implementation)이라는 측면에서는 너무 느릴 뿐 만 아니라 과거에 비해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과 같은 비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비판적 분석을 내놓고 있는 월가의 프로분석가들 중에
한국계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계 분석가들일수록 한국경제를 훨씬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책 당국이 이들을 경원시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한국계 분석가들은 다른 미국인들에 비해 한국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남다를 것이다.

이들이 한국경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국을 그만큼
더 세세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한국 비관론자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돼 있는 스티브 마빈 자딘
플레밍증권 서울지사장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은 아니지만, 가족적인 배경이나 근무경력 등으로 볼 때 누구보다도
한국에 대한 호감과 애정이 클 것으로 짐작된다.

문제는 이 "지한파"들이 제기하는 사항에 대한 한국경제 담당자들의
반응이다.

이들 분석가의 보고서가 정밀한 분석임에도, 이를 반박하는 국내 전문가들의
논리는 지나치게 감정에 흐르는 경우가 많다.

반론의 내용도 추상적이며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갖게된다.

지난 80년대 위기에 몰렸던 미국 경제의 상황을 반추해보자.

당시 미국은 소위 쌍둥이(재정 및 무역)적자에 허덕이며 경제적 몰락을
눈 앞에 두고있는 듯 했다.

그런 차에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더욱 흔들어놓는 내용의 책이 출간됐다.

예일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영국인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미국경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파헤쳤던
것이다.

케네디교수는 86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미국경제는 산업의 효율저하로
쇠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케네디 교수의 이런 비판에 대한 미국 정부 지도자들과 지식인
사회의 반응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행정부의 고위관리, 의회 지도자, 기업가, 소비자단체 간부 등 미국사회의
지도층이 케네디교수를 만나고자 했고, 그의 논리를 직접 듣는 기회를
다투어 마련했다.

그에게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듣고자 했다.

케네디 교수는 자신의 신랄한 비판을 뼈아픈 충고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미국 지도층의 진지한 자세에 감동했다.

그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결론을 내리게 됐다.

미국의 쇠퇴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미국이 사회 각 부문에 걸친 개혁을 시급히 서둘러야 할 상황이지만,
정치 지도자나 기업인 국민 등 각 계층이 개혁의지로 충만해 있는 만큼
난국은 얼마든지 극복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후 미국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닦게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지도층에 필요한 것은 폴 케네디의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당시 미국인들의 자세라고 생각된다.

한국경제에 비관적인 전문가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허심탄회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자세가 아쉽다.

그들의 논리를 제대로 들어보고,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인 논리와
계수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반면 그들의 주장이 옳고 합리적이라면 과감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다.

양약은 입에 쓴 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