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규모 적자재정 편성 ]]

내년도 예산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산이란 정부의 살림살이, 즉 정부재정활동을 결정하는 기본틀이 되기
때문에 법에 의해 국회 의결을 받아 확정되며 예산을 사용한 결과에 대해서도
국회의 결산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특히 IMF체제하에 있는 현 시점에서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정부재정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84조9천4백억원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의 심의과정에 많은 관심
이 쏠리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수행하는 역할은 크게 자원배분조정, 소득
재분배, 그리고 경제안정화 등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수입과 지출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정부재정은 이러한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이 된다.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일국의 부존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최대의 생산효과를 낳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강점은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가격을 매개로한 민간경제주체의
자발적인 교환활동이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는데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성숙한 자본주의 경제라 하더라도 국방 치안과 같이 시장이
제공하기 힘든 성격의 재화(공공재)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또 공해와 같이
시장에서 가격을 매개로 거래되지는 않지만 특정인의 행위가 분명히 타인
에게 정이나 부의 편익을 미치는 경우(외부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시장의 실패라고 일컫는 이러한 경우에는 정부가 자원배분과정에 개입하여
보다 효율적인 결과를 유도할 정당성이 생긴다.

시장을 통한 자원의 배분과 재화의 공급이 설사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가계간의 소득분배가 지나치게 불공평해지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정당성이 생긴다.

무엇이 적정한 소득분배인가는 특정사회의 시민감정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할수 있다.

복지국가개념이 강조되었던 1960~70년대 서구제국들이 예산을 보면 사회
보장성 지출의 규모와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음을 알수 있다.

자연 경제규모대비 정부재정의 비중도 증가하여 이들 국가에서는 정부예산
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고비로 이러한 "큰 정부"가 초래하는 비효율에 대한
비판이 일게 되고 정부보다는 시장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무드가 레이건-
대처의 등장과 함께 상승세를 타게 되었다.

경제가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경제안정이
뒷밭침되어야 한다.

지나친 수요증가는 인플레이션을 부른다.

반면, 총수요가 부족해 공급과잉이되면 생산자들은 설비투자와 고용을
줄이게 되고 이는 다시 소득감소 소비감소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러한 디플레이션의 해악은 대공황때 적나라하게 표출되었고 이에대한
반향으로 확대재정을 통해 총수요진작을 도모하는 케인즈식의 경제안정화
정책이 등장하였다.

정부지출은 늘이고 또 소비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세금을 삭감하는 확대
재정정책은 곧 적자재정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상의 기본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예산을 살펴보자.

우선 거시적인 관점에서 내년도 예산의 가장 큰 특징은 경기활성화를
목적으로 GDP의 5%에 달하는 적자재정을 편성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총수요가 드는 것인데 내수부문에서
소비나 투자가 늘어날 기미가 없고 해외수요인 수출실적도 기대수준에
못미치고 있다.

세입부문은 경기불황으로 예상했던 세수마저 확보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추가적으로 세금을 깎아 주어 내수를 진작시키기 어려운 상태이다.

결국 남은 길은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를
사주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국방비 교육비 농어촌 지원 등 과거 성역시됐던 부문들에서 전례없이
4천7백억원을 줄이는 등 경기부양을 위해 한푼이라도 더 쓰기 위해 지출
항목간의 조정을 한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그런데 예산의 세부항목을 살펴보면 13조5천억원규모의 재정적자가 반드시
경기부양으로 이어질지 의문스러운 점이 보인다.

우선 경제위기전의 예산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액수가 미미했던
금융구조조정지출(6조9천억원)과 사회복지 및 실업대책을 위한 지출
(13조2천억원)이 전체 예산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지출의 상당부분은 재화수요 용도가 아닌 이전지출로서 경기
부양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간접자본의 경우 액수는 전년도에 비해 5%정도 늘었지만 경기진작이나
고용효과라는 관점에서 볼때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항목들이 정치논리에
의해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요컨대 세수증대가 어려운 데도 구조조정관련 지출은 불가피해지는 현
시점에서는 적자재정이 곧 수요확대라는 안이한 사고에서 벗어나 기존
세출항목간의 과감한 우선순위 조정을 통해 경기회복이나 고용증대 효과를
노리는 것이 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전주성 <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jjun@mm ewha.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