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 시대 기업경영의 키워드중 하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의 강화다.

상호보완이라는 관점에서 한때 각광받았던 "문어발식 경영"으로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규모만 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근대적 경영방식으로는 전문분야에
특화된 세계 초일류기업과의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도마뱀식" 사업철수와 선택된 분야로의 역량집중이 아니고는 회사의 존립
자체가 어렵게 됐다.

선택과 집중은 "버리기"로부터 시작된다.

대기업들은 이미 주력업종내에서도 경쟁력이 없는 회사들을 매각 청산
경영철수 합병 등의 방법으로 정리하고 있다.

당장 이익이 나는 사업이라도 비주력이거나 1위가 아니면 과감히 벗어던지는
추세다.

소다회와 정밀화학 분야에 주력하기 위해 시장점유율 2위에 올라 있는
농약사업을 매각한 동양화학이나 미래형이 아니라고 알짜배기 라이신사업을
정리한 대상(주)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영학에 "25-50-75 법칙"이라는게 있다.

기업들이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거나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지만 그중 25%가
매출의 50%, 이익의 75%를 가져온다는 경험 법칙이다.

반대로 "50-25-0"이라는 법칙도 있다.

사업 또는 제품의 50%는 매출 기여도가 25%에 불과하고 이익 공헌도는 0%,
심지어는 이익을 갉아먹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경험 법칙들이다.

제일제당은 연간 매출액이 3억원이 넘지 않는 비경제적인 품목의 생산을
중단했다.

제품 품목수를 지난해보다 40% 적은 2천개 수준으로 끌어내리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으로 이 작업은 현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있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성격의 작업을 추진했으나 없어지는 품목수 만큼 새로운
품목군이 출시돼 효과가 없었다.

제일제당은 그래서 생산품목 총수를 줄이는 쪽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품목이 준다고 해서 매출이 주는 것은 아니다.

매출은 오히려 늘어난다.

이 회사는 실제로 봉지째 끓여먹는 레토르트 제품을 지난해 67개에서 올해
25개 품목으로 줄였으나 매출액은 거꾸로 68% 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제품의 종류가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한 것이거나 단기 매출 증대를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중.장기적 이익이나 고객 니즈에 부합되지 않는 방향으로 제품의 종류가
늘어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핵심 역량을 키우려는데 저해 요소가
되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다.

브랜드 이미지 약화와 생산의 복잡성을 증대시키고, 수요 예측의 어려움과
유통의 복잡성, 그리고 이에 따른 재고의 증가와 매출 채권의 과다 등을
가져온다.

한정된 자원을 특정부문에 집중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연구개발(R&D) 분야가 그렇다.

LG화학은 투자규모를 줄이지 않는 대신 승부사업에 R&D 예산을 집중 투입
하고 있다.

정보소재와 생명공학이 LG의 승부사업이다.

현대자동차는 승용차 개발 주기를 다소 늘리더라도 세계 자동차업계의
틈새시장을 겨냥할 다목적차량(MPV) 개발에 주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진 메이커들이 승용차에 개발비를 투입하는 동안 다른 분야에 투자해
과실을 따먹겠다는 계산이다.

선택과 집중이 거부할 수없는 경영전략이라는 사실은 기업들의 올해 경영
실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있다.

식품전문 기업인 농심 종업원들은 실직의 걱정은 커녕 예년과 다름없이
꼬박꼬박 나오는 보너스에 즐겁기만 하다.

회사 경영상태가 여전히 좋기 때문이다.

줄잡아 올해도 수백억원의 흑자가 예상될 정도다.

사업다각화의 유혹을 뿌리친 최고경영자의 판단이 종업원들의 미래까지
윤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동국제강은 창업이후 철강만을 고집했다.

구조조정의 회오리속에서 수많은 기업들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지만
동국제강의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튼튼한 회사라는 얘기다.

중소기업은 물론 현대 삼성 대우 LG SK 등 대기업 그룹들도 이제는 더이상
다각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재계 랭킹 16위였던 효성그룹은 20개에 육박하던 계열사를 하나로 줄이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쌍용도 본업인 양회를 중심으로하는 도마뱀 전략을 쓰고 있다.

5대 그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현대는 건설 자동차 전자 중화학 금융.서비스 등 5개 주력업종 중심으로
사업의 판도를 다시 짜고 있다.

이미 60여개 사업부문을 분사시켰다.

삼성도 2백여개사를 독립시키는 작업을 펴는 등 전자 금융 서비스 등 3~5개
주력업종을 중심으로 그룹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대우도 연말까지 현재 40개인 계열사를 10~15개로 줄이려 하고 있고 LG는
3~4개 업종을 독립기업협력체로 떨어뜨려 책임경영을 펴도록 하고 있다.

SK 역시 에너지와 정보통신을 핵심역량으로 하는 집중 전략을 펴고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재계 사업교환, 이른바 빅딜이다.

작년만 해도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 협상이다.

자동차는 삼성이 꿈에 그려오던 사업이고 전자는 대우의 세계경영에
없어서는 안될 사업.

그러나 두 그룹은 과감히 이들 사업을 내던질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핵심역량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오히려 삼성은 본업인 전자에 몰두하고 대우는 자동차에 그룹의 전력을
기울이는게 글로벌 시대 초일류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점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버리기가 곧 선택과 집중이라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IMF 관리체제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기업들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귀중한 경영철학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