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33) '울산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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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공단에 얽힌 뒷얘기 ]
62년2월3일 기공식과 함께 "울산공업센터"에는 간판이 내걸렸다.
61년 11월2일 한국경제인협회 미주 투자유치단이 미국 기업인들에게 했던
약속은 일단 지켜졌다.
기공식이 끝난 닷새후 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과 남궁련 부회장은 전문가를
대동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은 각 지역을 돌며 유력 인사들과 만나 울산공업단지에 대한 개략적
설계와 앞으로의 추진일정을 일일히 브리핑했다.
브리핑에는 하루속히 투자단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항상 곁들여졌다.
이들은 귀국 즉시 정부와 협의해 미국 투자단을 정식으로 초청키로 했다.
3월7일 경제인협회는 이병철 회장 이름으로 "우리측은 모든 준비가 돼 울산
공업단지가 마련됐으니 곧 방한해달라"는 전문을 미국 기업인 대표에게
보냈다.
"선기공 후건설"의 모토대로 정말 놀라운 스피드였다.
일이 너무 빨리 진척되자 미국측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
"모든 준비가 돼있다"는 얘기에 미국은 반신반의하며 여러차레 재확인
전문을 보내왔다.
드디어 5월11일 주한 UN사령관을 지낸 밴프리트 장군을 단장으로한 28명의
"미국 저명 실업인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 투자단의 면면을 살펴보자.
제너럴모터스 포드 웨스팅하우스 다우케미컬 등 세계적 대기업들을 비롯해
케리화학 비트로비료 하노버신탁 텍사코 스탠더드 센트럴제강 등 쟁쟁한
미국 산업계 각 분야의 핵심기업 대표가 총망라됐다.
이와 같은 거대 기업군이 대거 참가한 미국경제사절단은 이후에도 없었다.
단시일내에 어떻게 이런 기업군이 한국에 올 수 있었을까.
당시 투자유치단으로 미국과 유럽에 간 기업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그
운명을 걸머진 일을 처음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도 당시 민간 경제인들의 능력이나 노력은
놀라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미국 실업인단 일행은 도착 당일 박정희 의장, 송요찬 내각수반을 예방하고
경제기획원에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 한국경제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다음달 군용기와 특별열차를 갈아타며 울산으로 향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이 동행까지 했으니 문자 그대로 "민.관.군"이 합쳐 성심
성의껏 "모신" 것이다.
미국의 투자조사단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으나 안내실무를 맡은 당시 경제인
협회의 김주인 사무국장과 윤태엽 총무부장 등은 큰 걱정이 생겼다.
실업인단에게 보여줄 수 있는게 부지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불도저로 땅도 닦지 않고 있었다.
아마 소나무 장식을 한 엉성한 기공식 축하아치만이 보리밭 한 가운데 서
있는게 가보지않아도 눈에 선했다.
더군다나 주민들에게도 본격적인 공업단지 공사는 내년부터 시작할 계획이니
올 봄에는 보리 파종을 그대로 하라고 했었다.
이미 서울에서 알아본 바로는 부지엔 보리 녹파만 넘실거린다는 것이었다.
경제인협회 관계자들은 할 수 없이 UN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산간
벽지 농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밴프리트 장군에게 기댔다.
보리농사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니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예상대로 30~40cm이상 자란 싱싱한 보리밭이 눈앞에
있었다.
브리핑 담당자들은 식은 땀이 흐르는 표정이었다.
밴프리트 장군이 나섰다.
그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미국 기업인들에게 한국의 보리고개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한치의 땅도 놀릴 여유가 없는 한국 농촌 실정을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며 소개했다.
이것이 오리혀 미국 기업인들에게 전쟁피해에서 불사조처럼 일어서려는
한국인의 끈질긴 근면성으로 비춰졌고 동정심을 샀다는 후일담이다.
"아무 준비도 안된 것 아니냐"며 돌아섰으면 한국의 경제개발은 몇년 늦어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사정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미국 기업인들이 늘자 담
당자는 용기를 내 브리핑을 시작했다.
울산이 갖고 있는 공업입지의 이점을 중점 소개했다.
내용은 이랬다.
울산은 우선 해상과 육상의 교통요충이다.
북쪽은 포항 남쪽은 부산 그리고 남해안 일대까지 장차 대규모 공업벨트지대
로 발전할 수 있다.
또 후방.근접중소도시들이 많아 노동력 공급이 쉽다는 점도 장점이다.
더불어 근대공업에 필수인 용수문제는 인접한 강들 외에 필요시 낙동강물을
파이프로 연결해 공급받을 수 있다.
미국 기업인들은 브리핑 내용보다 항만의 위치, 지형 등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인근 지역을 답사한 이들은 공업지대 항구로서 울산해안지형에 매우 흡족해
했다.
미국 실업인단은 5월26일 한국을 떠날 때까지 연일 한국 기업들과 투자
협상을 진행했다.
이 결과 여러 회사들이 한국 기업과 투자의향서를 교환하게 됐다.
떠나기 전날에는 송요찬 내각수반실에서 정부측 경제인협회 미국실업인단
등 3자가 모여 투자예비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병철 회장과 밴프리트 단장은 양국간 경제교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동
성명서도 발표했다.
미국의 대한투자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 투자단의 활동으로 한국 국민은 해외협력에 의한 경제발전 가능성을
눈으로 보고 믿기 시작했다.
기업인들도 이 투자 교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자신감도 얻었다.
5.16 군사쿠데타 후 1년간 표류한 경제가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
부터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1일자 ).
62년2월3일 기공식과 함께 "울산공업센터"에는 간판이 내걸렸다.
61년 11월2일 한국경제인협회 미주 투자유치단이 미국 기업인들에게 했던
약속은 일단 지켜졌다.
기공식이 끝난 닷새후 경제인협회 이병철 회장과 남궁련 부회장은 전문가를
대동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들은 각 지역을 돌며 유력 인사들과 만나 울산공업단지에 대한 개략적
설계와 앞으로의 추진일정을 일일히 브리핑했다.
브리핑에는 하루속히 투자단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항상 곁들여졌다.
이들은 귀국 즉시 정부와 협의해 미국 투자단을 정식으로 초청키로 했다.
3월7일 경제인협회는 이병철 회장 이름으로 "우리측은 모든 준비가 돼 울산
공업단지가 마련됐으니 곧 방한해달라"는 전문을 미국 기업인 대표에게
보냈다.
"선기공 후건설"의 모토대로 정말 놀라운 스피드였다.
일이 너무 빨리 진척되자 미국측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
"모든 준비가 돼있다"는 얘기에 미국은 반신반의하며 여러차레 재확인
전문을 보내왔다.
드디어 5월11일 주한 UN사령관을 지낸 밴프리트 장군을 단장으로한 28명의
"미국 저명 실업인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 투자단의 면면을 살펴보자.
제너럴모터스 포드 웨스팅하우스 다우케미컬 등 세계적 대기업들을 비롯해
케리화학 비트로비료 하노버신탁 텍사코 스탠더드 센트럴제강 등 쟁쟁한
미국 산업계 각 분야의 핵심기업 대표가 총망라됐다.
이와 같은 거대 기업군이 대거 참가한 미국경제사절단은 이후에도 없었다.
단시일내에 어떻게 이런 기업군이 한국에 올 수 있었을까.
당시 투자유치단으로 미국과 유럽에 간 기업인들은 국가를 대표하고 그
운명을 걸머진 일을 처음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도 당시 민간 경제인들의 능력이나 노력은
놀라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미국 실업인단 일행은 도착 당일 박정희 의장, 송요찬 내각수반을 예방하고
경제기획원에서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 한국경제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다음달 군용기와 특별열차를 갈아타며 울산으로 향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이 동행까지 했으니 문자 그대로 "민.관.군"이 합쳐 성심
성의껏 "모신" 것이다.
미국의 투자조사단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으나 안내실무를 맡은 당시 경제인
협회의 김주인 사무국장과 윤태엽 총무부장 등은 큰 걱정이 생겼다.
실업인단에게 보여줄 수 있는게 부지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불도저로 땅도 닦지 않고 있었다.
아마 소나무 장식을 한 엉성한 기공식 축하아치만이 보리밭 한 가운데 서
있는게 가보지않아도 눈에 선했다.
더군다나 주민들에게도 본격적인 공업단지 공사는 내년부터 시작할 계획이니
올 봄에는 보리 파종을 그대로 하라고 했었다.
이미 서울에서 알아본 바로는 부지엔 보리 녹파만 넘실거린다는 것이었다.
경제인협회 관계자들은 할 수 없이 UN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산간
벽지 농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밴프리트 장군에게 기댔다.
보리농사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니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예상대로 30~40cm이상 자란 싱싱한 보리밭이 눈앞에
있었다.
브리핑 담당자들은 식은 땀이 흐르는 표정이었다.
밴프리트 장군이 나섰다.
그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미국 기업인들에게 한국의 보리고개에 대해
설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한치의 땅도 놀릴 여유가 없는 한국 농촌 실정을 특유의
유머를 섞어가며 소개했다.
이것이 오리혀 미국 기업인들에게 전쟁피해에서 불사조처럼 일어서려는
한국인의 끈질긴 근면성으로 비춰졌고 동정심을 샀다는 후일담이다.
"아무 준비도 안된 것 아니냐"며 돌아섰으면 한국의 경제개발은 몇년 늦어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사정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미국 기업인들이 늘자 담
당자는 용기를 내 브리핑을 시작했다.
울산이 갖고 있는 공업입지의 이점을 중점 소개했다.
내용은 이랬다.
울산은 우선 해상과 육상의 교통요충이다.
북쪽은 포항 남쪽은 부산 그리고 남해안 일대까지 장차 대규모 공업벨트지대
로 발전할 수 있다.
또 후방.근접중소도시들이 많아 노동력 공급이 쉽다는 점도 장점이다.
더불어 근대공업에 필수인 용수문제는 인접한 강들 외에 필요시 낙동강물을
파이프로 연결해 공급받을 수 있다.
미국 기업인들은 브리핑 내용보다 항만의 위치, 지형 등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인근 지역을 답사한 이들은 공업지대 항구로서 울산해안지형에 매우 흡족해
했다.
미국 실업인단은 5월26일 한국을 떠날 때까지 연일 한국 기업들과 투자
협상을 진행했다.
이 결과 여러 회사들이 한국 기업과 투자의향서를 교환하게 됐다.
떠나기 전날에는 송요찬 내각수반실에서 정부측 경제인협회 미국실업인단
등 3자가 모여 투자예비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병철 회장과 밴프리트 단장은 양국간 경제교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동
성명서도 발표했다.
미국의 대한투자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 투자단의 활동으로 한국 국민은 해외협력에 의한 경제발전 가능성을
눈으로 보고 믿기 시작했다.
기업인들도 이 투자 교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자신감도 얻었다.
5.16 군사쿠데타 후 1년간 표류한 경제가 방향을 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
부터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