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11시.

서울 당산 서중학교에서는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 4급 이하 직원 8백여명
이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바깥 날씨와 달리 실내는 따뜻했으나 수험생들의 표정에서
는 전혀 훈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이날 시험은 단순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
아니라 성적표가 그대로 살생부로 변하는 "생존시험"이기 때문.

수험생들은 정리해고 리스트에 오르지 않기 위해 1시간동안 80문제를 사력을
다해 풀었다.

"성적이 나쁘면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이 기준이
발표된 이후 일체의 연말모임을 취소하고 퇴근후 독서실로 직행해 밤새워
산재보험법책과 씨름했다."

시험을 끝낸 한 직원의 소감은 이날 시험이 평생 그 어떤 시험보다 힘들었음
을 웅변해주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이처럼 "인생은 성적순"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부로부터 전체 직원의 10%를 구조조정(감원)하라는 통보를 받은 공단측은
고민끝에 결국 업무능력평가시험으로 대상자를 가리기로 결정했다.

이달초 노조격인 노사협의회가 별다른 객관적인 해고기준을 제시하기 힘든
상황에서 공정하게 해고대상을 정할 수 있는 방법은 시험밖에 없다고 건의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단은 정리해고대상 기준을 4급 이하 직원에 대해서는 업무능력
평가시험 60%, 징계 근무성적 포상 등 근무평가 40%로 정했다.

1~3급 관리직은 근무평가로만 적용했다.

하지만 4급 이하 직원들의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근무평가에는 큰
차이가 없어 이번 시험성적은 살생부 등재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공단 관계자는 "업무추진력과 관계없이 머리 좋은 직원들이 상당히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며 "냉정하긴 하지만 시험으로 정리해고자 선발대상을 결정하
면 적어도 잡음은 적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공단은 4급이하 8백76명을 포함한 전체 직원 1천3백17명 가운데 10.6%인
1백40명을 오는 28일 최종 선정, 내년 1월 해고할 방침이다.

< 김광현 기자 kk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