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속세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판사판, 야단법석.
요즈음 불교 조계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판 모습에 이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이판사판과 야단법석이란 말은 둘다 불교쪽에서 나온 말이란 것을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후기 수행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이판승, 절의 운영이나
사무를 맡는 승려를 사판승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야단법석이란 설법을 들으려 사람이 많이 몰려 법당밖 들에다
강단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같은 뜻의 말들이 지금은 더 생각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판, 시끄럽고
무질서함을 나타내는 말로 각각 바뀌었다.
우리 불교계 안에서 싸움이 극렬했고 또 소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총무원장 3선연임 시비로 불거진 조계종의 최근 분란도 속세의 일반인에게는
"조계종내에서 또 싸움이 벌어졌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스님들의 몸싸움과 실랑이가 도를 넘어 폭력과 어우러짐을 볼때
그곳에는 계도 율도 없고, "속세"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찌보면 속세도 아닌 듯했다.
버젓이 자행되는 불법행위를 에워싸고 있는 경찰은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불법도 없고 속세법도 없는 성역"이라고 하면 잘못 된 것일까.
조계종 일각에서 종단싸움에 "속세법"적용은 적절치않다는 주장이 있다
한다.
법은 언어 종교 도덕 정치 경제 등과 함께 하는 문화현상이다.
법과 다른 문화영역 상호간에는 매우 복잡한 교차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됐을 때는 계율이나 율이 무수한 관계의
질서를 세웠으나 지금은 국가가 강제하는 규범인 법이 대신하고 있다.
일부 스님들의 주장이 불법을 율로 다스리려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지, 사찰경내에서의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속세법은 긴 역사속에서 사회통합의 역할을 해왔고 그래서 오늘날 법치사회
가 등장했다.
승려가 속세에서 행한 위법적 처사는 속세법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중생의 마음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3일자 ).
요즈음 불교 조계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판 모습에 이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이판사판과 야단법석이란 말은 둘다 불교쪽에서 나온 말이란 것을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후기 수행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이판승, 절의 운영이나
사무를 맡는 승려를 사판승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야단법석이란 설법을 들으려 사람이 많이 몰려 법당밖 들에다
강단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같은 뜻의 말들이 지금은 더 생각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판, 시끄럽고
무질서함을 나타내는 말로 각각 바뀌었다.
우리 불교계 안에서 싸움이 극렬했고 또 소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총무원장 3선연임 시비로 불거진 조계종의 최근 분란도 속세의 일반인에게는
"조계종내에서 또 싸움이 벌어졌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스님들의 몸싸움과 실랑이가 도를 넘어 폭력과 어우러짐을 볼때
그곳에는 계도 율도 없고, "속세"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찌보면 속세도 아닌 듯했다.
버젓이 자행되는 불법행위를 에워싸고 있는 경찰은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불법도 없고 속세법도 없는 성역"이라고 하면 잘못 된 것일까.
조계종 일각에서 종단싸움에 "속세법"적용은 적절치않다는 주장이 있다
한다.
법은 언어 종교 도덕 정치 경제 등과 함께 하는 문화현상이다.
법과 다른 문화영역 상호간에는 매우 복잡한 교차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됐을 때는 계율이나 율이 무수한 관계의
질서를 세웠으나 지금은 국가가 강제하는 규범인 법이 대신하고 있다.
일부 스님들의 주장이 불법을 율로 다스리려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지, 사찰경내에서의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속세법은 긴 역사속에서 사회통합의 역할을 해왔고 그래서 오늘날 법치사회
가 등장했다.
승려가 속세에서 행한 위법적 처사는 속세법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중생의 마음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