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텐 < 미국 브루킹스 경제연구소장 >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고 미국에까지 그 여파가 번질 조짐을 보이면서
지구촌의 사람들은 30년대와 같은 공황상황을 우려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진국들이 슬기롭게 대처했고 이제 최악의 위기는 넘긴
상태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점검해볼 때 위기의 잠재적 요소까지 제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아시아는 상처를 추스리는 단계에 들어섰지만 조속한 시일내에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경제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냉전의 잔재와 유물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상태여서 러시아의 불안정은 지구촌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남미사람들은 특유의 느긋함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남미권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경제는 물론 주변국들 모두 아직까지 짙은 불확실성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경제의 본격적인 재건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따라서 세계인들이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논의는 세계경제를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관건의 하나가 될 것이다.

미국은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해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적극적인 대처를 꼽을 수 있다.

지난 여름 아시아위기 여파가 미국대륙까지 위협하는 조짐이 보이자 FRB는
세차례에 걸쳐 금리를 0.75%포인트 인하하는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2차 금리인하 때는 공개시장위원회 회의도 소집하지 않은채 금리인하를
발표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이같은 FRB의 적극적 대처는 미국주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주식시장의 안정과 상승무드는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경제의 상황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미국의 소비가 지속될 것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아시아 등의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FRB의 잇따른 금리인하는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금리를 내리게 하는 압력
으로도 작용했다.

선진국들의 동시금리인하로 아시아각국의 차입여건과 외국인투자 환경도
개선됐다.

FRB는 미국의 중앙은행이다.

FRB가 미국금융시장의 폭락을 방치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시장이 여타 세계
공급업자들에 대한 "마지막 보루(consumer of last resort)"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미국의 두번째 노력은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한 미국 정부의 추가출자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의회는 "IMF가 위기에 직면한 국가들에 이용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IMF가 자금제공 원칙을 수정하지 않는 한 추가출자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브라질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고 IMF의 추가출자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남미경제 전체가 위험해 진다는 판단에 따라 적절한 조치가
취해졌다.

IMF 운영과 관련한 미국 의회의 우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세계경제운영을 위한 새로운 금융질서(Financial
architecture)를 확립하는 것이 올해의 주요과제가 될 것이다.

세번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외무역적자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한
미국의 태도는 세계경제위기를 안정궤도로 되돌려 놓기 위한 또다른 노력
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지난해 2천1백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미국과의 무역에서 가장 많은 흑자를 내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고 중국 또한
적지 않은 흑자(6백억달러)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질 경우 올해는 3천억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7조달러가 넘는 미국경제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이만한 규모의 무역적자는
감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외국의 값싼 제품수입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득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이 처한 위치와 역할, 그리고 자유무역주의를 표방해온 원칙 때문에
무역에서 발생하는 적자에 대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온것 또한 사실
이다.

그러나 이같은 적자가 무한정 지속되게 방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기도 하다.

재정적자를 흑자로 돌려놓기 바빠 무역적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세계경제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이상 미국의 관심이 이제 무역
적자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에 쏠릴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역할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경제가 본궤도에 들어서지 않는 한 아시아위기의 근원적 해결은 기대
하기 어렵다.

일본은 아시아제국들과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이웃이다.

일본경제의 크기를 말할 때 흔히 인용하는 예가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의 경제를 모두 합해도 한국의 경제규모보다
크지 않다.

그러나 그런 한국 경제가 일본경제의 12분의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일본
경제가 얼마나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일본정부는 1천9백50억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지만 일본
투자자들은 물론 서방세계로 부터도 그 적극성을 의심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현금이 부족한 여타 아시아제국처럼 다급하지 않다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일본의 경기부양에 대한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일본이 안고 있는 딜레마다.

일본은 경제를 부양해 아시아를 위기에서 구출하고, 세계경제 재건에도
이바지한다는 글로벌 리더로서의 의식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주변의 의심을
하루빨리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중국 역시 미국에 대한 소나기 수출만 일삼을 뿐 미국기업이나 해외기업이
중국과 사업을 쉽게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과 중국의 자기중심주의적인 정책은 미국의 늘어나는 무역적자와
어울어져 보호무역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99년은 "무역전쟁의 해"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경제를 미국 혼자 떠받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세계경제가 이제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은 만큼 지구촌의 모든 국가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몫을 찾아야 한다.

위기를 맞고 있는 국가들은 물론 일본과 중국, 유럽연합(EU) 등도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치료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위기는 오래갈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