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운영제도의 시행 ]

61년 11월 내각 기획통제관실 기획조정관으로 취임하고 보니 이미 20여명
직원들로 구성된 조직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행정부가 육군의 운영계획제도를 도입키로 한 건 7월께부터였다.

그러니까 그동안 기획조정관을 몇달 물색하다가 적임자가 없어 나에게
맡겼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듬해(6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5개년 경제계획 사업을 위해
계획작성에 참가했던 나의 경험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취임해서 보니 내각 기획통제관실이 해야할 할 일은 크게 보아 세가지였다.

첫째 새 제도인만큼 기획운영제도 시행에 따른 각종 양식을 정비해야 했다.

기획안 심사분석양식 등은 종류도 많은데다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둘째는 이 제도와 각종 양식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관계 공무원
들을 교육시키는 일이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교육은 비단 중앙부처뿐만 아니라 시 도 군 지방행정관서
공무원들까지를 대상으로 해야 했다.

이를 위한 교육.연수 업무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기획통제제도의 중추기구라 할 기획조정위원회 운영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기획조정위원회는 각부처의 기획조정관과 경제기획원 예산국장 등 내각
수반이 임명한 14명의 위원으로 구성돼있었다.

위원장은 기획통제관이었고 부위원장은 경제기획원의 기획조정관, 그리고
내각의 기획조정관인 내가 규정에 의해 간사장이 됐다.

기획조정위원회의 기능은 범위도 광범위했고 중요한 일이 많았다.

62년 10월16일자 각령 제 2백28호를 보면 "내각의 정책과 기획을 조정하고
각 원.부.처.청장간의 기획업무를 긴밀하게 하기 위해... (중략) 기획조정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돼있다.

구체적으로는 1) 내각 또는 내각수반 소속의 여러 기관의 장기 중기 단기
기획의 조정 2) 예산지침의 기준인 각종 운영계획의 목표 설정 및 방침에
관한 사항들을 심의조정하는 것이다.

나는 취임한지 얼마 안돼 기획통제관실이 행정부에 육군의 운영계획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군인들과 정통 관료들간의 마찰이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각수반 비서실장"과 "내각 기획통제관"의 위계질서를 놓고 마찰이
빚어졌다.

관료조직이나 군인이나 관할과 명령계통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통제관과
비서실장이 어느 쪽이 장자가 되느냐가 문제됐다.

여러번 왔다갔다 하더니 비서실은 성격상 하부기구를 둘 수 없다는 유권해석
으로 결국 비서실과 기획통제관실은 내각수반밑에 병존하는 별도조직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또 각 부처의 기획조정관 위치도 문제였다.

각 부 장관밑에 차관이 있고 그 밑에 기획조정관이 있게 되면 국장급에서
볼때 상위계층이 하나더 생기는 셈이었다.

더군다나 기획조정관실이 생기면 이 "실"에 고급공무원이 추가로 배치돼
필시 옥상옥이 된다며 국장급에선 대단한 저항까지 일어났다.

이런 반발에 밀려 각 부처의 기획조정관실은 최고회의 의결로 설치된지
5주만에 없어진다.(61.10.2)

그래서 당초 의결 내용도 "행정각부의 기획수립에 참여하고 이를 심사 분석
및 조정하기 위하여 차관 밑에 기획조정관 1인을 둘 수 있다"로 축소됐다.

각부의 기획조정관은 부하직원이 없는 외토리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업무영역만은 그대로 남았고 각부처의 기획조정관은 국장급 가운데
서열이 제일 높게 매겨짐으로서 우수한 인재들도 채워졌다.

초창기 각부 기획조정관으로 구성된 기획조정위원회의 멤버를 기어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먼저 경제기획원의 기획조정관은 나중에 부총리를 역임한 김학렬씨였다.

외무부는 김영주(외무차관 역임) 상공부는 이철승(후에 상공차관)씨 등이었
다.

경기도는 양택식(후에 서울시장)씨였고 기획원 예산국장이던 진봉현(보사부
장관 역임)씨도 멤버였다.

국방부 기획조정관은 나중에 보사부장관을 지낸 김태동씨였다.

한마디로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이런 사람들과 때로는 도와가며 더러는 싸워가며 일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기획조정관으로 취임한 이후 기획통제관실의 당면 과제는 군의 운영
계획제도 양식을 행정부 특히 5개년 경제계획 추진에 적용,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군의 운영계획이란 본질적으로 "소비경제회계" 양식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5개년 계획 중 기간산업 등은 "기업회계"를 원용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래서 기업회계 전문가들을 참가시켜 오랜 시일을 두고 토의에 토의를
거듭했다.

특히 심사분석에 있어 "진도평가" "효율성" 등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 나왔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나중에 계속 수정해 나가기로 하고 여러 양식을 일단
작성해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5개년계획 관련 "운영계획" 양식은 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 주재하의 "수출과 경제확대회의"에서 "브리핑" 양식의 골격을 이루게
됐다.

기획운영제도 시행을 위한 공무원 교육은 힘은 들었지만 잘 이뤄졌다.

오히려 군사정부라서 효율이 높았는지도 모른다.

군사정부는 이 제도의 효율적인 실시를 위해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관계
공무원의 철저한 교육.훈련을 강조했다.

아무리 내각수반의 특별지시로 실시된 것이라지만 오죽하면 최고권력자인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까지 솔선해서 교육을 받을 정도였다.

미국군 훈련제도의 영향일까...

과거 정권에서는 볼 수 없던 현상이어서 기억에 남아있다.

62년초에 나온 "기획"창간호에 실린 당시 교육프로그램을 보자.

"가.과정 1기획과 예산 11시간 2신계획제도 1시간 3국가계획 상황 2시간
나.교육기간(1차) 2월1~2일 (2차)2월5~6일
다.교육대상 최고회의의장 부의장 의원 고문 및 고급장교 94명"

이와 별도로 공무원 교육원에서 7차에 걸쳐 모두 5백48명의 고급공무원을
상대로 "기획과 예산"에 대해 50시간 교육을 실시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