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초.

미국 시애틀 보잉 본사에서는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프로젝트
가 비밀리에 착수됐다.

"종이 설계도 없는 비행기 만들기"

설계 부품조달 조립제작 시험 등 항공기생산에 필요한 복잡한 과정을 모두
컴퓨터로 동시에 진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항공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구상으로 탄생된 것이 보잉 777이다.

보잉은 우선 설계테이블과 종이 도면을 없앴다.

보통 비행기 한대를 만드는데 많게는 수십만장의 설계 도면이 필요하다.

도면이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가 돼야 비로소 비행기가 탄생한다.

그러나 보잉은 단 한장의 종이 도면도 쓰지 않았다.

모든 설계 작업은 컴퓨터 속에서 입체적으로 이뤄졌다.

보잉의 실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객인 세계의 항공사와 고속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고객이 원하는 항공기 디자인이나 시스템 등을 바로 설계에 반영시켰다.

고객들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입체공간에서
비행기 내부를 걸어다녔다.

잘못된 것은 바로 수정을 요구했다.

모든 것은 네트워크를 통해 "동시에" 진행됐다.

제작과정도 마찬가지였다.

777 모델에 들어간 핵심부품의 20%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동체를 만드는 일본의 하청업체들은 태평양 바다밑에 깔린 전용 광케이블을
통해 미국 본사와 리얼타임으로 연결됐다.

시애틀 본사에서 부품의 설계가 바뀌면 일본에서 동시에 부품이 제작된다.

일본에서 부품이 깎여지는 그 시간 또 미국에서는 부품성능에 대한 시험이
컴퓨터로 이뤄졌다.

설계 제작 시험이 아예 시차없이 한꺼번에 진행된 것이다.

"광속생산"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보잉 777은 4년만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성공적
으로 하늘을 날았다.

보통 항공기를 새로 개발하는데는 설계 시점부터 10년 가까운 기간이
걸린다.

초스피드로 만들어진 777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유럽 에어버스사의 A/330이나 A/340 모델과의 경쟁에서 단숨에 75%의
시장을 확보했다.

보잉의 실험은 금새 모든 산업계의 눈길을 끌었다.

혁신적인 생산방식이 인건비를 30%나 줄이고 부품불량률도 종전 15%에서
5%밑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보잉의 "종이없는 비행기 만들기" 프로젝트가 이처럼 성공을 거둔 비결는
어디에 있을까.

답은 컴퓨터와 고속 통신망이 만들어낸 디지털 네트워크에 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생산의 개념이 바뀐다.

생산은 더이상 생산자만의 고유 영역이 아니다.

생산 과정에 소비자도 참여해 구미에 맞는 상품을 만든다.

주문형 방송에서 좋아하는 뉴스나 해설만을 골라 시청하는 식이다.

하나의 네트워크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한데 연결시킨 결과이다.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와 만족도도 높아진다.

미국 크라이슬러의 디트로이트 본사.

이곳에서는 새차를 개발할때 대형 부품메이커를 함께 참여시킨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딜러들과도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체제를
갖추고 있다.

자동차 구입의사가 있는 고객 숫자는 매시간마다 전국적으로 집계돼 본사로
들어온다.

그 숫자는 즉시 공장으로 전달돼 생산대수를 결정한다.

공장은 부품업체에 필요한 양 만큼 발주한다.

개발자와 생산자, 부품업체, 판매 대리점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 모든
정보가 동시에 교환되는 것이다.

이른바 동시공학(Simultaneous Engineering)이자 공급자사슬관리(SCM.
Supply Chain Management)이다.

크라이슬러는 이같은 시스템으로 자동차 개발에서 생산에 걸리는 기간을
종전의 3분의 1로 줄였다.

이 회사는 소비자들이 실제 생산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상중이다.

예컨대 소비자가 딜러들의 쇼룸에서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선택해 조합하면 그것을 생산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광속경제시대에는 대량생산도 무의미해진다.

지금까지는 대략적인 수요예측으로 생산량을 정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고객을 찾아갖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은 이미 옛날 얘기가 됐다.

고객이 주문하면 동시에 생산이 이뤄진다.

컴퓨터메이커인 델사는 고객으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주문받아 3-4일만에
제품을 공급하는 즉시생산시스템(JIT) 체계를 갖추고 있다.

주문받은 양만 생산하기 때문에 재고는 아예 없다.

델사는 이같은 시스템으로 생산.유통 코스트를 절감해 값싼 컴퓨터를
내놓을 수 있었다.

P&G는 월마트의 일일판매정보를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해 공급한다.

두 회사는 주문 생산 재고정보를 공유한다.

컴퓨터와 네트워크로 한 회사처럼 정보가 관리된다.

재고가 쌓일 이유가 없다.

디지털 광속경제는 이처럼 종전의 "생산이론"을 송두리채 파괴하고 있다.

"얼마나 빨리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가" "공급이
넘쳐 쌓이는 재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는 기존 생산시스템이 갖는 영원한 숙제이다.

디지털 광속생산방식은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 특별취재팀 = 추창근(정보통신부장/팀장)
손희식 정종태 양준영(정보통신부) 한우덕(국제부)
조성근(증권부) 유병연 김인식(경제부)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