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렬씨와의 만남 ]

6개월 남짓 내각기획통제관실 기획조정관으로 일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 업무에 직접 참여하면서 나라 살림에 관한 각종 사항들을 직접
익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당시 경제기획원 김학렬 기획조정관을 만난 점이다.

먼저 김학렬씨 얘기부터 시작하자.

김학렬씨는 직책상 내각에 설치된 기획조정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나는 이 위원회 간사장이었다.

서로 초면이었지만 만나자 마자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기획조정위원회를 국가운영계획 예산 등을 검토 조정하는 권위있고 효율적인
기구로 이끌어 나가자는 목표가 같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23년생으로 나보다 한 살이 적었다.

개성이 뚜렷해 주위에 화제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부총리(69~71)로서 한국경제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라고 불릴 정도로 신임도 두터웠다.

별명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면도날"은 머리가 영민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이름 중간자인 "학"자를 일본말로 부른 "쓰루"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불필요한 지방근육은 하나도 붙어있지 않아 체형이 꼭 학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또 이름난 독설가여서 부하직원은 물론 상사들도 그의 욕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런 김학렬씨도 나하고는 죽이 잘 맞았다.

나중에 부총리가 돼서는 내게 경제정책 개인 고문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부총리 별실에서 경제정책을 논하다가 김학렬씨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메모용
노트를 꺼냈다.

깨알같은 글씨를 가득메운 노트를 펼쳐보이면서 "나는 24가지 정책 과제를
엄선해 챙기고 다닌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내가 받아쳤다.

"일국의 경제정책총수가 꼽은 24가지 과제란게 도대체 뭐요. 내 생각에는
부총리쯤 되면 한 고조처럼 세 가지만 챙기면 될 것이오. 첫째 물가안정
둘째 산업정책 즉 3천만이 먹고 살 수 있는 산업육성책, 셋째로 국제전략 등
아니겠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쏘아붙이니 성미급한 김학렬도 일순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천천히 "변명"했다.

"박 대통령과 수시로 경제문제를 논하다보니 이렇게 됐오. 이 분이 여간
숫자에 밝고 꼼꼼하시지 않거든. 그래서 이렇게 과제별로 노트에 정리해
놓아야 유사시 활용할 수 있오"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던 김씨가 나와 이처럼 가까웠던데는
이유가 있다.

서로 생각이나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내게 이런 말도 했었다.

"김형은 아까(일본말로 때)가 묻지 않았어. 직위나 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그래선지 틀에 박힌 관리들은 생각 못하는 신선한
착상을 한단 말이야"

이건 사실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당시 내각 기획통제관이었던 김영무 준장은 최고회의와 각 부처협의를 위해
기획조정위원회의 의장역할을 할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부위원장인 김학렬씨와 간사장인 내가 위원회를 끌고 가다싶이 했다.

위원회는 규정에 의해 매주 수요일에 열렸다.

초창기에는 안건이 산적해 한번 열리면 며칠씩 계속됐다.

11월달에 열린 제1차 5개년계획에 대한 경제기획원의 설명회와 각원.부의
62년 "최초 운영계획"의 종합검토회의는 각각 7일간이나 계속됐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5개년계획 통계자료의 불확실성 <>민간자본
특히 외국자본 도입의 어려움 <>국제수지에 대한 신빙성 부족 등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당시 안건을 하나 소개한다.

62년 예산을 기본운영계획과 대조하면서 연 4일간 종합 검토했을 때 얘기다.

세입재원에 있어서 대충자금(미국원조 물자 판매자금)은 USOM처장과 정부와
의 협의에 따라 우선 2천7백50억원을 책정했다.

그러나 조세와 전매입금수입 등 국내세수는 2천5백17억원으로 원조자금보다
2백33억원이 적었다.

이래 갖고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이 안선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한국 동란후 매해 예산에서 국내 세수 보다 원조액이 더 큰 것이 항시
문제가 됐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국채발행과 차입금을 증가시켜 계수를 맞췄다.

나는 이 토의과정을 통해 한나라의 살림을 맡고 있는 경제기획원 예산국장의
고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진봉현 예산국장이 반대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땀을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엔 매일 밤 10시는 돼야 퇴근했다.

그래도 힘이 솟구치는 시절이었다.

후일 민간 경제계에 몸담으면서 이 시기에 경험이 귀중했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군대의 "운영계획제도" "참모연구" "상황판단" "심사분석" 등은 내가 일을
처리해나가는데 있어 꼭 짚고 넘어가는 항목들이 됐다.

취임한지 몇개월이 지나면서 유능한 각 부처 기획조정관들이 하나 둘
타부서로 승진하거나 옮겨갔다.

김학렬 부위원장이 재무차관으로 영전하는 등 4~5명이 빠져나갔다.

5.16후 시일이 지나니 쿠테타 주역들도 권력의 묘미를 알기 시작한 것
같았다.

최고위원들 중에는 독불장군식 개인 구상이나 프로젝트를 불쑥불쑥 내놓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내각수반의 권한도 축소되는 것 같았고 기획통제관실 업무도 "기획조정"
보다 사후처리인 "심사분석"에 무게가 옮겨지고 있었다.

어떤 부처에서는 참모역할을 하는 기획조정관 대신 행정 명령계통에 직접
속하도록 아예 차관보로 대체하는 구상도 나왔다.

"이곳에 머물러 관료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