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은행의 새로운 개발전략 ]

이진순 <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

세계은행은 새로운 개발모형을 찾고 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이 괄목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중,
모범생이라 할 아시아 개도국들이 경제위기에 휘말리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할 모형을 발굴해 내는 것이
세계은행의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것은 바로 우리 경제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와 세계은행이 경비를 분담하면서 오는 26일부터 이틀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제로 국제회의를 공동 개최하는 것은 이같은
배경에서다.

그동안 세계은행은 도로 항만 통신 전력 등에 대한 개도국 투자를 장기
저리자금으로 지원하는 데 많은 재원과 노력을 투입했다.

자본이 축적되면 경제성장과 발전은 의례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실제 경험에 대한 연구들은, 장기적으로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물적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임을 보여줬다.

큰 논란과 반발을 야기했던 크루그만 미국 MIT 교수의 지적도 같은 요지
였다.

아시아의 고속성장은 물적 자본과 노동 투입이 늘어난 결과에 불과하고
생산성 향상 없이는 성장세가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학계의 이러한 추이를 반영해 세계은행의 정책도 바뀌고
있다.

생산성 향상의 관건이 인적자본과 지식축적에 있다고 보고 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현실은 아시아에서 성장둔화에 비할 바 없이 경악할 사건을 배태하고
있었다.

세계은행이 "기적"이라고 극찬하던 한국 및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경제가 바닥이 꺼지듯 무너진 것이다.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대한 주류 경제학의 이해가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거시경제의 문제라기보다는 광의의 경제제도 문제다.

한국의 경우 비교적 완만한 물가상승에 높은 저축과 투자율을 갖고 있었다.

재정은 비교적 건전했으며 국제수지적자나 총외채 규모도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소위 거시경제의 기본(fundamentals)은 튼튼했다는 얘기다.

문제는 재벌들이 수익보다는 덩치를 키우기 위해 투자를 감행했고 금융부문
에선 위험을 무시한채 대출이 이루어졌다는데 있었다.

이를 제어할 기업지배구조나 금융 건전성 규제 등 공식 혹은 비공식 제도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미시 측면에서 경제 구석구석이 광범위하게 부실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시민의 자유와 재산권에 대한
침해도 정당화된다고 보는 경제제일주의와 그에 따른 정부의 경제관리에
있다.

정부는 물론 학자와 일반시민도 경제제일주의를 신봉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마저 "선성장"의 뒷자리로 밀렸다.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지켜줘야 할 검찰과 사법부도 경제우선논리에
밀려 대기업주들을 특별 대우했다.

행정부는 공식.비공식 제도의 정립을 통해 시장경제의 건전한 작동을
추구하기보다는 국제경쟁으로부터 국내산업을 보호하고 특정산업을 육성하는
등 시장에 대한 간섭위주의 "관리"를 통해 경제실적의 "조장"에 힘썼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할 힘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경제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기규칙은 "정부 힘을
빌리면 안될 사업도 되고 못 빌리면 될 사업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유경쟁과 자기책임의 시장경제원칙이 무너지고 다른 한편으로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만연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국가질서와 관치경제가 경제를 망쳐 놓았다는 얘기다.

현정부는 당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는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다.

세계은행은 과거와 같은 단선적 접근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개발모형을
모색중이다.

세계은행의 스티글리츠 수석부총재는 개발을 "사회의 총체적 변환과정"으로
규정하면서 80년대 남미 경제위기 해소에 적용한 "워싱톤 견해"의 편협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김대중 대통령과 올펜슨 세계은행 총재는 하나의 개발
모델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제로 세계은행 50년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국제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를통해 지속적 발전을 위한 사법제도 금융시스템 사회제도 등 경제 하부
시스템의 올바른 구축방향을 모색해 보게 된다.

이번 국제회의가 21세기를 향한 한국, 나아가 개도국들의 새로운 개발
패러다임이 구체화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