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39) '통화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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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판단, 통화개혁 ]
62년 4월이 되자 내각기획통제관실은 눈에 띄게 활기를 잃어갔다.
새로운 제안을 해도 결제가 나는데 며칠씩 기다리기 일쑤였다.
때론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최고회의의 경제, 상공위원들이 자기 소관싸움을 하며 한건주의로 나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정부조직에 몸담은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참에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영국 출장 제의가 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문정관 피터 스마트가 날 위해 만든 프로그램
이었다.
그는 5.16이 나던 날 새벽 신변에 이상이 있을 것 같으면 가족을 데리고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전화까지 했을 정도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5.16 직후부터 여러차례 나를 영국에 보내주려고 애썼다.
내가 공무원 신분으로 해외여행이 어렵다고 하자 "정부 경제계 학계를
포함하는 4,5명 초청"이란 새 카드를 들고나온 것이었다.
인원 선정도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영국이 전후에 어떻게 다시 경제를 추스렸는가를 공무원들과 함께 보고
좋을 것 같아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영국을 배우러가자고 할 게 못됐다.
경제기획원이 예산국까지 통합해 막강한 진용으로 계획업무를 챙기기 시작
하면서 기획통제관실의 업무도 눈에 띄게 줄었다.
뿐만 아니라 "연줄과 눈치"로 움직이는 것이 거슬려 일할 맛도 안났다.
그런데다 혁명공약 제3장에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고 했던 쿠데타 주역들은 약속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부정과 부패가 움틀거렸다.
군인들도 권력과 금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이때 이미 소위 "5대 의혹사건"이 주체세력들에 의해
한창 저질러지고 있었다.
군과 관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나는 "새도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는데
이곳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의아해 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상공부 이칠승 기획조정관은 정색을 하며 "어디 더 좋은데 가는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짧은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나는 실직자가 됐다.
마침 아내가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62년 5월부터 나는 집에서 돌도 채 안된 큰 딸 소임이를 돌보며 "사상계"
에서 청탁받은 "EEC의 설립경위와 전망"에 관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충무로 5가에 있는 2층 전세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던 와중에 군사정부는 또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6월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해 "환"을 10분의 1로 절하해 "원"으로 바꾼
것이다.
중국 화교들이 숨겨놓은 엄청난 현금을 이 기회에 끌어내 1차 5개년 계획을
위한 자금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는 유언비어같은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기
시작했다.
당일 10시까지 모은행 퇴계로 지점에 나가 일인당 10만원까지 화폐를 새
돈으로 바꾸라는 사발통문이 돌았다.
아내는 강의가 있어 학교에 나가고 필자가 환전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광경인가.
은행입구에서부터 1백미터도 넘는 꾸불꾸불한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 윤기없는 얼굴, 원망하는 듯한 눈빛, 삶에 지친 군상들
이었다.
"왜 권력자들은 죄없는 백성들을 이렇게도 고달프게 하는가"
폭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씨의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통화개혁 전날인
6월9일 경제인협회 중진들은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의 초청으로 만찬을 함께
했다.
홍재선 이정림 남궁련씨 등이 참석했다.
송 수반은 식사를 하던중 여덟시에 중대 발표가 있으니 함께 듣자며 라디오
를 가져오라고 했다.
임시뉴스에서 통화개혁 소식이 흘러나왔다.
모두들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이병철 회장 남궁련 부회장 등은 불과 2주전에 방한했던 밴프리트 장군 등
투자사절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자리를 함께한 민간경제인들은 외국인들의 투자나 차관도입은 당분간
어렵게 됐다며 큰 걱정부터 했다.
오히려 송 수반은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한 조치인데 왜 기뻐하지 않느냐"
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단순하다고 할까, 세상을 물정을 너무 몰랐다고나 할까.
이튿날 아침 이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에게 불려갔다.
박 의장은 대뜸 통화개혁조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 조달에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해서 단행한 것입니다.
극비리에 진행하다보니 사전에 상의도 못했습니다"
"신화폐교환을 위해 날마다 수백만명이 은행 창구에 줄을 서야 함으로 그
원성이 모두 정부에 돌아갈 것이고... 큰 돈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인들의 의견도 사전에 들을 것을 그랬군요"라며 혼자말처럼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 전화벨은 쉴사이 없이 울리고, 전국에서 통화개혁에 대한 부정적
인 여론이 속속 보고됐다.
박 의장은 눈에 띄게 초조하고 난감해 하는 기색이었다.(호암자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작이었다.
미국은 사전협의없이 단행한 통화개혁에 대해 격분하면서 원조중단까지
들먹였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이 통화조치만으로도 한국경제가 1~2년뒤로 후퇴했다고 경제계는 안타까워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일자 ).
62년 4월이 되자 내각기획통제관실은 눈에 띄게 활기를 잃어갔다.
새로운 제안을 해도 결제가 나는데 며칠씩 기다리기 일쑤였다.
때론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최고회의의 경제, 상공위원들이 자기 소관싸움을 하며 한건주의로 나가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정부조직에 몸담은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참에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영국 출장 제의가 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문정관 피터 스마트가 날 위해 만든 프로그램
이었다.
그는 5.16이 나던 날 새벽 신변에 이상이 있을 것 같으면 가족을 데리고
자기네 집으로 오라고 전화까지 했을 정도로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5.16 직후부터 여러차례 나를 영국에 보내주려고 애썼다.
내가 공무원 신분으로 해외여행이 어렵다고 하자 "정부 경제계 학계를
포함하는 4,5명 초청"이란 새 카드를 들고나온 것이었다.
인원 선정도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영국이 전후에 어떻게 다시 경제를 추스렸는가를 공무원들과 함께 보고
좋을 것 같아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영국을 배우러가자고 할 게 못됐다.
경제기획원이 예산국까지 통합해 막강한 진용으로 계획업무를 챙기기 시작
하면서 기획통제관실의 업무도 눈에 띄게 줄었다.
뿐만 아니라 "연줄과 눈치"로 움직이는 것이 거슬려 일할 맛도 안났다.
그런데다 혁명공약 제3장에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고 했던 쿠데타 주역들은 약속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부정과 부패가 움틀거렸다.
군인들도 권력과 금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이때 이미 소위 "5대 의혹사건"이 주체세력들에 의해
한창 저질러지고 있었다.
군과 관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나는 "새도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는데
이곳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의아해 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상공부 이칠승 기획조정관은 정색을 하며 "어디 더 좋은데 가는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짧은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나는 실직자가 됐다.
마침 아내가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62년 5월부터 나는 집에서 돌도 채 안된 큰 딸 소임이를 돌보며 "사상계"
에서 청탁받은 "EEC의 설립경위와 전망"에 관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충무로 5가에 있는 2층 전세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던 와중에 군사정부는 또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6월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해 "환"을 10분의 1로 절하해 "원"으로 바꾼
것이다.
중국 화교들이 숨겨놓은 엄청난 현금을 이 기회에 끌어내 1차 5개년 계획을
위한 자금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는 유언비어같은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기
시작했다.
당일 10시까지 모은행 퇴계로 지점에 나가 일인당 10만원까지 화폐를 새
돈으로 바꾸라는 사발통문이 돌았다.
아내는 강의가 있어 학교에 나가고 필자가 환전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광경인가.
은행입구에서부터 1백미터도 넘는 꾸불꾸불한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 윤기없는 얼굴, 원망하는 듯한 눈빛, 삶에 지친 군상들
이었다.
"왜 권력자들은 죄없는 백성들을 이렇게도 고달프게 하는가"
폭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씨의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통화개혁 전날인
6월9일 경제인협회 중진들은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의 초청으로 만찬을 함께
했다.
홍재선 이정림 남궁련씨 등이 참석했다.
송 수반은 식사를 하던중 여덟시에 중대 발표가 있으니 함께 듣자며 라디오
를 가져오라고 했다.
임시뉴스에서 통화개혁 소식이 흘러나왔다.
모두들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이병철 회장 남궁련 부회장 등은 불과 2주전에 방한했던 밴프리트 장군 등
투자사절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자리를 함께한 민간경제인들은 외국인들의 투자나 차관도입은 당분간
어렵게 됐다며 큰 걱정부터 했다.
오히려 송 수반은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한 조치인데 왜 기뻐하지 않느냐"
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단순하다고 할까, 세상을 물정을 너무 몰랐다고나 할까.
이튿날 아침 이 회장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에게 불려갔다.
박 의장은 대뜸 통화개혁조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 조달에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해서 단행한 것입니다.
극비리에 진행하다보니 사전에 상의도 못했습니다"
"신화폐교환을 위해 날마다 수백만명이 은행 창구에 줄을 서야 함으로 그
원성이 모두 정부에 돌아갈 것이고... 큰 돈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인들의 의견도 사전에 들을 것을 그랬군요"라며 혼자말처럼
이야기했다.
그 순간에 전화벨은 쉴사이 없이 울리고, 전국에서 통화개혁에 대한 부정적
인 여론이 속속 보고됐다.
박 의장은 눈에 띄게 초조하고 난감해 하는 기색이었다.(호암자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작이었다.
미국은 사전협의없이 단행한 통화개혁에 대해 격분하면서 원조중단까지
들먹였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다.
이 통화조치만으로도 한국경제가 1~2년뒤로 후퇴했다고 경제계는 안타까워
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