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일이던 97년 12월 18일.

투표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던 김&장의 정계성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걸려온 긴급호출전화를 받았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 입고 S호텔에 도착한 것은 정각 오후 5시.

재경부 실무자들, 정부에 자문을 제공하는 G사 S사 등 세계 유수의 투자
은행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채무이행각서에 서명한지 보름이 지났지만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시절
이었다.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이 팀의 그날 회의 주제는 자금조달방안.

국채를 발행할 것인가, 아니면 은행차입을 할 것인가, 국채를 발행한다면
시장에서 어찌하는 것이 가능할까 등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각자 돌아가서 시장상황을 조사하고 차입여건 등을 타진하기로 할일을
정하고 나니 호텔객실내의 TV는 벌써 대선투표의 승패가 판가름났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때였기 때문에 정 변호사는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검토했다"고 회고한다.

채무연장만 해도 그렇다.

외채를 못갚아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던 남미의 예는 어땠는지,
연장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연장하는지, 어느 범위의 어떤 채무를 연장대상
으로 할 것인지, 연장이 안되면 어찌할 것인지...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자금조달과 채무연장,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긋나면 국가부도가 날 판이다.

"재경부 사람들과 함께 국내에 나와 있는 체이스 씨티 보스톤, 유럽의
파리바 도이체 BNP 등 외국은행 대표자들을 만나 우리의 입장을 설명했지요"

우선 IMF 자금이 들어오고 98년 3월31일 2백18억달러의 채무에 대해 만기를
연장받았다.

또 4월초에는 40억달러의 외평채가 성공적으로 발행됐다.

여기에는 외국금융기관과 로펌들에도 널리 알려진 그의 역할이 컸다.

당시 며칠을 밤샘하면서 고생을 했지만 국가부도를 모면하고 난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이 남는다.

국내 최고의 금융변호사로 꼽히는 정 변호사의 일이란 단순히 자금차입을
위한 의견서나 계약서 작성에 그치지 않는다.

IMF 위기와 같은 국가적인 현안에 닥치면 정부에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은행감독원 금융감독원의 설립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재경부 금융발전
심의위원회위원, 산자부 기업규제심의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김&장의 금융팀을 이끌고 있는 그는 20년 이상 금융을 전담해온 이 분야의
도사다.

웬만큼 알려진 거래치고 그의 손을 안거친 것이 별로 없다.

지난 76년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김&장에 합류했다.

79년 김&장은 회사와 금융부문으로 조직을 갈랐고 이때 그는 당시 현안
이었던 차관도입과 관련, 은행쪽을 맡으면서 금융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김&장의 금융파트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정 변호사는 설립자인 김영무 변호사를 따라다니며 금융관련거래와 이에
관한 법적인 노하우를 배웠다.

수출입은행 외환은행 등 국내은행들의 자문역을 맡으면서 외국을 누볐다.

79년 대한항공이 사기업중 처음으로 5억달러의 차관을 빌려 비행기 구매에
나섰을때 금융실무를 맡았던 것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워싱턴에서 차관도입계약이 체결됐는데 이날은 고 박정희 전대통령이
암살되던 10월26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80년대 초까지 ABN암로 BNP(파리국립은행) 크레디리요네 등 외국은행들
의 진출과 관련된 업무들을 맡아 처리했다.

외환은행과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이 도입한 수억달러짜리의 점보론(Jumbo
Loan.거액차입)도 그의 손을 거쳤다.

82,83년 무렵 한국투자신탁 대한투자신탁의 외국인대상 수익증권 발행,
외국증권지점 진출, 합작투신사 설립 등에도 큰 역할을 했다.

86년 대우중공업과 유공의 해외전환사채, 89년 삼미특수강이 발행한 최초의
해외신주인수권부사채(BW) 5천만달러, 90년 산업은행 최초의 양키본드
3억달러 및 삼성물산최초의 주식예탁증서(DR) 발행, 95년 한누리살로몬증권
과 96년 환은스미스바니증권이 설립 등 김&장에서 수행한 중요한 금융거래는
그가 지휘했다.

처음부터 금융변호사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맡겨지는 대로 일하다보니 금융변호사가 됐다"고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소탈하면서도 차분하고 꼼꼼한 그에게 금융변호사의 일은 잘
맞았다.

그는 금융변호사가 되려면 "큰 가방, 이를 들 수 있는 근력, 몇날이고 밤을
샐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말하곤 한다.

< 채자영 기자 jychai@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