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화개혁의 배경 ]

경제파탄과 국민생활에 큰 불편을 가져온 통화개혁은 누가 주도했는가.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의장인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인가.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당시 최고위원 중 한 사람인 유원식 대령이 독단적으
로 착안하고 추진했다.

그렇다면 박 의장은 왜 이를 묵인했을까.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이동원씨(전 외무장관)의 회고록이 해답을
시사해준다.

이동원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박정희)는 자신이 밝히듯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보겠다는 야망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오른 군인에 불과했다. 때문에 지식이나 정책,
철학적인 면은 물론 행정관리나 정치기술등에서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이동원 저,대통령을 그리며)

유원식의 회고는 이 보다 훨씬 직선적이다.

"정경문화"(83년9월호)에 실린 "최고회의 진시황 유원식 회고록"에는 "5.16
후 육군본부에서 3일을 지내고 국회의사당으로 옮긴 후 박정희 장군에게
"모든 권력과 지위와 명예는 박장군이 차지하고 경제는 내게 맡겨주십시요"
라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원식은 군사정부가 새로 시작한 1차 5개년계획 작성도 본인이 직접 명령,
지휘했다고 자랑했다.

김정렴(전 박대통령비서실장) 천병규(전 재무장관)씨 등이 쓴 통화개혁에
대한 기록을 봐도 "경제는 내가 맡겠다"고 했다는 유원식의 주장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인 64년 어느날 나는 그때 이미 준장을
끝으로 퇴역한 유원식씨와 점심을 같이한 일이 있다.

서울대학교 박동묘 교수의 권유로 셋이서 자리를 같이 했다.

유 씨와는 초면이었다.

내 머리속에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달리 "유 장군"의 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매우 수척해 보였고 성격 또한 소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국내외 경제 정세를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그를 위로하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서먹서먹해하던 그도 말문을 열었다.

"김국장,1 차 5개년계획 목표성장률을 왜 7.1%로 올려잡은 줄 아시오. 여기
있는 박동묘 교수는 너무 높다고 난색을 표했었지요. 나는 일본의 소득 배증
계획이 성장목표를 연 7.2%로 잡은 걸 보고 우리도 뒤질 수 없다는 오기로
비슷한 수준으로 잡았던 거예요. 경제개발을 위해서라면 인력이나 재원을 총
동원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소. 말하자면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통화개혁을 단행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서 통화개혁을 단행해서 화교나 부자들이 숨긴 돈을 끄집어내고, 이
돈을 "산업개발공사"에 투자해 5개년계획 프로젝트의 내자로 투입하려고
했습니다. 사심은 전혀 없었소"

그가 "사심없이" 통화개혁이란 극약조치를 단행한 것은 그의 잘못된 신념에
서 비롯됐다.

5.16 바로 다음날 한국은행을 찾아간 그의 소감을 들어보자.

"한국은행에서 브리핑을 받을 때 우리 외화보유고가 2억7천만달러가 넘는다
는 사실을 알고 놀랐어요. 은행 지하실 2칸에 꽉찬 눈부신 금괴를 보고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어요. 자유당과 민주당정권이 분탕질해서 나라를 거덜낸
줄 알았는데... 상상을 넘는 부자였지 뭡니까. 외화가 근 3억나 달러가 되는
데 도대체 어디다 써야하나 걱정할 정도였어요"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만 기가 막혔다.

이런 사람들이 쿠데타를 하고 나라 살림을 일 년 수 개월 동안이나 좌지우지
했으니...

그래도 그는 태연하게 회고담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오 5.16후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외화보유액이 9천달러로
떨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옵디다. 9천달러면 아직도 꽤 남아있다고 안심했는데,
자세한 보고를 들어보니 큰 일 났더군요. 국제분담금, 만기상환금 등 확정
부채를 빼고나면 쓸 수 있는 외화가 전혀 없다지 뭡니까. 자세히 조사를
시켰더니, 새나라자동차 등 나중에 4대의혹사건으로 불거진 프로젝트와 관련
해 힘있는 군인들이 달려들어 뭉텅뭉텅 써버렸다는 것이었오. 관련된 부패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요"

주도자인 유 씨의 말에서 알 수 있듯 62년 6월의 통화개혁은 경제적인 고려
가 전혀 없었던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런만큼 시행초기부터 부작용이 속출했
고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통화개혁은 미국의 압력으로 20일도 채 못되어 동결한 자금을 백지화하며
유야무야 됐다.

잘못된 정책 때문에 힘없는 백성만 고달팠던 것이다.

경제 불안속에 대외신용도는 급락했고 그 결과 교섭중이던 외자도 도입이
중단됐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바짝 긴장해 기간산업 프로젝트 추진에 힘을 내던 경제인
들은 맥이 빠지고 말았다.

이때의 심정을 경제인협회 이병철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혼미속에서 지도자가 방황하고 경제는 불안하고 사회가 혼란하니 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였다"(호암자전)

자구하나, 토시하나 까지 신경 쓰는 이병철 삼성창업주의 표현치고는
"극언"에 가깝다 하겠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