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 중앙대 교수. 경제학 >

바나나 수입규제문제를 놓고 미국과 유럽연합(EU)사이에 몇달째 무역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수입장벽을 높게 쌓고 바나나를 자급자족하던 시대가 있었다.

국내가격이 워낙 높아 온실속에서 비싼 석유로 난방해가며 바나나를 재배
해도 농민들에게는 수지가 맞았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는 바나나를 전부 수입하는 것이 외화를 절약하는
길이었다.

왜냐하면 바나나 수입비용보다 석유 등 원자재 수입비용이 오히려 더 컸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그래서 정부는 바나나수입을 자유화하기로 했다.

그러자 바나나 재배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정치논리에 밀려 정부는 몇년 더 바나나 수입을 규제했다.

지난 80년대말에 일어난 일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일이 더 큰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 빅딜로 인해 삼성자동차의 SM5 차종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부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문제는 정치권의 확대 재생산으로 지역감정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할 대우자동차가 SM5 차종을 앞으로
몇년간 더 생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바나나와 마찬가지로 SM5는 생산할수록 손해가 난다.

또다시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앞서고 있는 셈이다.

5대 그룹의 평균부채비율이 작년 12월말 현재 2백84%로 1년전의 4백73%에
비해 급격히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매각과 유상증자를 통해 부채를 상환하고 자본금을 확충한 결과라면
많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작년 한햇동안 5대 그룹 전체의 자산재평가액은 무려 15조원에 달한 반면
유상증자액은 5조원에 머물렀다.

원래 자산재평가는 도매물가 상승률이 누적하여 15%가 될 때 허용하도록
돼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 규정과 상관없이 내년말까지 1회에 한해 자산재평가를
허용한 것이다.

이에따라 실제로 부동산가격은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부가격은 상향조정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환율이 높아졌다고 기존에 도입된 기계설비 가치도 덩달아 상승한 것으로
조정됐다.

경기불황으로 수익성이 떨어진 기계설비값이 하향조정돼야지 어떻게 상향
조정될 수 있는가.

이런 점들로 인해 외국투자자들은 우리 기업회계정보의 투명성을 의심하고
있다.

IMF 환란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정치논리 우선, 기업정보의 투명성 부족과
같은 일들이 반복해 발생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경제의 기본질서에 관한 법과 제도가 미비하고 이를 공정히
집행할 국민의식이 확립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은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야 오래 간다.

우리경제의 하부구조는 경제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시장경제
기본질서에 관한 법과 제도이다.

지난 정권의 가장 큰 잘못은 이러한 법과 제도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데 있다.

사실 세계은행은 우리 경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의
미비에 있다고 보고 구조조정차관(SAL)을 공여해 각 부문에 걸친 제도개혁을
독려하고 있다.

우리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 금융 노동 기업 정부부문의 제도개혁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향상과 투명경영을 위해 사외이사제가 도입됐다.

공정거래법개정과 기업파산법개정이 추진되고 있으며 회계정보의 투명성,
감사제도확립 회계기준확립을 위한 제도도 마련되고 있다.

공공부문에서도 효율적인 정책수행을 위한 정부조직개편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개혁추진당국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제도개혁으로 인해 권한이 크게 줄어들게 되는 정부관료를 비롯한 이해
당사자들은 갖가지 명분을 내세워 반발하고 있다.

사회 인프라 개혁을 통한 이득은 금방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우리
경제의 안전판 형태로 나타난다.

당장의 이득은 없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이해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벌그룹간 빅딜이나 금융기관 퇴출처럼 비교적 소수를 대상으로 한 개혁
보다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인프라 개혁은 훨씬 힘들고 장시간이
요구된다.

진정한 개혁은 갈 길이 멀고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