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대통령과 간친회 ]

62년 12월 5일 방한 한 일본의 안도호로쿠 사장(오노다 시멘트) 등 경제
사절단과는 한일협력위원회 설치 방안을 주로 논의했다.

10일 일본사절단을 보낸 후 곧바로 다음해 1월8일에 있을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과의 간친회 준비에 착수했다.

사무국 직원들은 이 간친회가 정부 최고권력자와의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지난 61년 3월 27일 열렸던 장면 내각 수뇌부와 한국경제협의회간의
"관민 정책협의" 이후 처음있는 일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장소는 코리아하우스로 정했다.

참석인사 연락, 자료 준비 등 진행은 모두 윤태엽 총무부장(92년 작고.
전경련 상근부회장 역임)에게 맡겼다.

얘기가 나온 김에 윤태엽씨에 대해 몇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사무국 운영이나,회의준비 등 실무에서는 윤태엽씨는 풍부한 경험,경력
등 면에서 볼 때 나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도 나보다 여섯살 위였다.

솔직히 말해 당시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에게서 전수받느라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기억 나는 일이 있다.

사무국장 취임 초 회원사 인사를 다닐 때다.

당시 윤 부장은 마치 유치원생의 손을 잡고 끌고 다니듯 나를 안내했다.

건건마다 코치역할을 맡았고 사소한 일까지 도와줬다.

이를테면 어떤 회원사 사장실 문앞에선 "이 사람 앞에선 절대 이런
말은 해선 안된다""특히 누구누구 이름은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식으로 "지침"까지 줬다.

춘수(윤태엽씨의 아호)와 나는 81년 그가 전경련 상근부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가끔 만나 서로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같이 한 사이"라며 둘만이
아는 농담을 하곤 했다.

경험 많은 윤 부장이 옆에 있었지만 박정희 의장과 경제인들이 처음 갖는
간친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무국장인 내가 고민해야할 거리
였다.

특히 이병철 회장을 비롯 당시 민간 경제계의 대표격인 인사들이 이런 저런
사연으로 나오지 못해 걱정이 됐다.

이 회장은 경제인협회의 내분과 외압,특히 당시 중앙정보부 개입으로
경제인협회 회장 재선에 실패한 이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외자도입과 공업화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재계를 리드하던 그가 없으니
이 문제를 누가 꺼낼 것인가.

이 회장 뿐만 아니었다.

보세가공으로 수출 산업 개척의 선각자 역할을 한 천우사 전택보 사장도
못 나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전 사장은 5.16 직후 "반혁명 음모"로 몰려 11월말까지 옥고를 치렀었다.

게다가 재계의 주류라 할 경방 김용완 사장은 참석 여부가 불확실했다.

나온다해도 발언은 좀처럼 하지 않을 듯 했다.

이들 재계 지도자들이 빠진 상태에서 민간 경제계의 주장을 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무엇보다 우선 발언자의 권위가 문제였다.

요즘 말로 "말발"이 좀처럼 서지 않을 것 같았다.

63년 1월 8일 오후 6시 코리아하우스 대식당.

경제인협회 회원은 40여명이 참석했다.

이정림 경제인협회장은 개회사를 끝내고 박정희 의장에게 "한 말씀"을
청했다.

박 의장은 "오늘은 여러 경제인들의 고견을 듣고자 왔으니 기탄없이
말씀해달라"고 다시 바통을 넘겼다.

어색할 정도로 침묵이 흘렀다.

걱정했던 대로였다.

다행히 평소 배심좋고 추진력이 남달랐던 이한원 부회장(대한제분 사장)이
말을 꺼냈다.

요지는 세가지였다.

정치.사회 안정과 민심을 속히 잡아줄 것, 외자도입을 하는데 애로가
많으니 정부에서 각종 행정절차를 간소화해 줄 것, 경제인들이 보다
자유롭게 해외에 나가 경제협력을 추진 할 수 있도록 여권발급등
특별 조치를 취해 줄 것 등이었다.

이어서 이원만 삼경물산 사장(코오롱 창업주)이 자진해서 일어났다.

이 사장은 자기와 일본 산업계와의 오랜 관계부터 얘기를 꺼냈다.

일본이 세계를 상대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을 배워 우리도 수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간간히 어색한 일본 말까지 섞어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미리 준비해온 듯 일본에서 가져온 고무뱀을 박 의장 앞에서 꺼내 보였다.

꼬리를 잡고 흔들자 뱀장난감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고개를 쳐들고
허리를 좌우로 꿈틀거렸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 등도 준비해왔다.

"일본은 포크와 나이프를 수출해 연 3억달러 이상을 벌고있습니다. 별 기술
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스텐레스를 형에 맞추어 찍어내고 닦아서 광택을
내면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근로자들의 손재주는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임금은 일본의 5분의 1도 안됩니다. 더군다나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엄청난 실업자가 있으니 무엇인들 못하겠습까"

너무 열변을 토하는데다 좀 길어지는 듯 하자 회원들은 수근거리기 시작
했다.

이를 눈치 챈 박의장은 "시간은 걱정말고 계속 하십시오. 대단히 참고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더욱 신이나서 홍콩의 성공 사례까지 소개했다.

"24시간 양복 맞춤 서비스"를 자세히 설명하더니 한시간이 넘는 열변을
끝냈다.

박 의장은 간친회가 끝난 후 수출 얘기가 특히 인상 깊었다며 다음날
중으로 경제계 대표들이 최고회의에 나와 자세한 얘기를 해달라고 말했다.

이 구상은 두달 후인 3월3일 수출산업촉진위원회 발족으로 구체화된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