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삼성의 주요 임원들이 미국 LA의 한 대형 양판점에 모였다.

이건희회장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고 이곳에 달려온 임원들은 매장 곳곳을
다니며 국산제품의 전시 상태를 둘러봤다.

그러나 진열대 전면에 위치한 국산제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의 제품이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채 "찬밥"대우를 받고
있거나 심지어 창고속에 처박혀 있기까지 했다.

우리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을 얘기할 때면 곧잘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21세기는 디자인 시대".

산업디자인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아무리 가격과 품질이 좋더라도 "소비자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그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가격 경쟁력에 의존하던 우리 기업들로서는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산업자원부와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이 공동으로 실시한 "디자인
센서스" 결과를 보면 저가 공세만으로는 더이상 해외 시장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해외 바이어들은 상품 구매시 품질(32.8%)과 디자인
(25.1%)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반해 가격(21.2%)과 마케팅(8.1%)요소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다.

반면 국내 무역실무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이들은 국산제품의 수출시 가격(44.3%)을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았으며 이어 품질(28.2%)과 마케팅(10.5%)의 순이었다.

디자인을 지적한 응답자는 10.2%에 불과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물건을 팔려 드는 셈이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낮다보니 우리 기업들의 디자인 경쟁력도
크게 뒤질수 밖에 없다.

한국을 1백으로 했을 때 각국의 디자인 경쟁력은 <>일본 1백40 <>미국
1백37 <>EU국 1백34 등으로 우리 대기업의 디자인 수준은 선진국의
60~70%수준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주요 경쟁 상대국인 대만(1백9), 싱가포르(1백2), 홍콩(1백2)
등에도 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 관계자는 "외국제품을 사는 한국 소비자들의
절반이상이 구매 이유에 대해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 반면,
한국산 제품을 사는 유럽인 가운데 "디자인이 좋아서"라고 답하는 비율은
1백명당 6~7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비관할 수만은 없다.

가격의존도가 높은 저가 수출전략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진 만큼 전사적으로 "디자인에 사활을 걸겠다"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상품과의 차별화 전략 <>최고경영자의 마인드 변화
등이 급선무다.

지금까지 국내 산업 디자인의 70~80%는 외국 상품의 디자인을 리메이크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향후 국내 기업이 디자인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독창성 확보"가
최대 과제라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이것도 TV라고 하자"는 식의 기존 통념을 뒤바꾸어 놓는
제품을 내지 못했다는 얘기다.

문이 하늘로 치켜올려지는 자동차, 헬멧 모양의 TV, 교각을 유리잔처럼
만들어 조심성을 일깨워주는 다리, 포도주 빛깔의 냉장고등.

또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기면서도 결국엔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고 마는
경영진의 보수성도 문제다.

이런 관행아래에선 세계 소비자들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튀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디자이너 양성과정과 같은 하부 구조의 질적 개선도 시급하다.

97년 기준 미국의 제품디자인 전공 재학생수는 4천여명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두배인 8천여명에 이른다.

양적으로만 팽창됐을 뿐 교육과정을 보면 수요자인 기업체가 요구하는
수준에 크게 모자란다는 지적이다.

< 윤성민 기자 smyo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