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촉진위위원회 발족 >

수출로 경제를 도약시키겠다고는 했지만 몇세기 동안 침체의 구렁에 빠진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지난한 과제였다.

경제인들만의 힘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수출산업 촉진위원회" 활동을 모든 정부 경제인 근로자 국민
등 경제주체들이 한 마음으로 분발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그 첫 시도로서 내각수반을 고문으로, 경제부처 장관과 은행장들을 명예위원
으로 추대키로 했다.

사실 김현철 수반을 고문으로 추대키론 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않았다.

일전에 적은 대로 내각수반실을 찾은 경제인협회 회장단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벌 하나가 정부와 싸워도 정부는 패하는 겁니다"라며 언짢은
심기를 드러내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김 수반은 경제통이자 특히 수출의 중요성을 아는 이였다.

흔쾌히 고문직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우리가 명예위원으로 추대하려는
장관과 은행장들도 같이 참석토록하겠다는 언질까지 줬다.

이 때 명예위원으로 관계에서 박충훈 상공, 장경순 농림 장관등이 추대됐고
금융계에선 민병로 한은총재, 서진수 산업은행 총재, 박동규 중소기업은행장
등이 합류했다.

위원장으론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 물망에 올랐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해
이원만 사장(코오롱 창업주)이 선출됐다.

위원회는 중소수출업자까지 망라한 37명으로 구성됐다.

위원회 구성을 마쳤으니 이제 발회식(발족식)만 남았다.

사무국 직원들을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국민의 주의를 끌 수 있을지에
대해 지혜를 짰다.

요즘 같으면 이벤트 회사에 용역을 주면 된다.

당시에는 이벤트라는 용어조차 없었다.

나는 이색적인 발족식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예술인과 배우들까지 초청키로
했다.

이런 모임에 배우까지 등장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수출산업촉진위원회 취지문"에도 기예인이라는 새 용어를 사용했었다.

기술자와 예술인을 합친 조어로 나전칠기 등 전통공예품, 또 장래에는
영화도 산업의 주축이 돼야 한다는 구상에서 이 말을 썼다.

그래서 발족식에 무용가 김백봉과 조화공예의 선구자이자 독립투사인
장선희 선생도 특별히 초청했다.

63년3월7일이 "발회식"날이었다.

이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공성술 조사역을 불렀다.

공 조사역은 6척이 훨씬 넘는 훤칠한 키에 사교에 능하고 교섭력이 있었다.

"사무국 지프차를 내줄테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여배우 엄앵란을 행사전
까지 반도호텔로 데려오도록 하시오"

"야외촬영이 있다던데요...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오후 6시 정각 반도호텔.

김 수반이 도착하면서 식이 시작됐다.

사무국장인 나는 위원회 설립 경위보고를 마치고 초대된 인사들을 한 사람씩
소개해 갔다.

바로 이때 한 직원이 엄앵란씨가 왔다는 쪽지를 건네줬다.

엉겁결에 나는 "엄앙난씨가 도착했다"고 잘못 소개하고 말았다.

의장석 옆 기자석에서 쿡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 수반의 격려사는 그의 외모 그대로 성의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었다.

"작년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반조성의 해였다면, 금년은 계획추진의
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시책에 있어서 첫째 안정기반을 견지할
것이며, 둘째 국제수지 역조개선을 위해서 수출제일주의를...(중략).
나아가 금년을 수출의 해로 정하고 정부와 민간이 일치단결 하여 범국민운동
으로 수출의욕을 고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5개년 계획에서 빠진 "수출산업 투자"를 최우선으로 할 것을 새롭게
천명했다.

"수출제일주의"니 "수출의 날"이니 하는 용어는 뒤에 박정희가 정부정책으로
정식 채택했다.

수차례 얘기한 대로 "수출제일주의"를 처음 제창한 이는 천우사 전택보
사장이었다.

당시 상공장관을 지낸 박충훈씨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전택보 사장이 항상 우리나라는 수출제일주의로 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마음에 들어 정부에서도 쓰기로 했다"고...

칵테일 리셉션이 시작됐다.

참석자는 모두 2백20여명으로 반도호텔 다이너스티홀은 초만원을 이뤘다.

여배우는 역시 달랐다.

엄앵란씨는 마치 큰 어항속의 왕 금붕어처럼 주위의 고관대작, 고급장성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연분홍에 금실수를 놓은 한복차림의 그녀는 연회장내 조명처럼 눈부셨다.

이때처럼 인기 배우의 위력에 압도당한 일은 없었다.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수출촉진행사에 웬 인기여배우 등장"등의 제목으로
가십란을 메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공 조사역은 이날 엄앵란 씨가 화장을 새로 하고
머리도 다시 만지는 등 준비를 오래 하는 바람에 시간을 못 맞출까봐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위원회는 구성했지만 수출산업개발이란 전인미답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과
같았다.

조직을 만들고 취지문을 읽었다고 위원회가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인들끼리 모여 회의를 자주 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중단없이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었다.

두메산골 초등학생까지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느낄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수출입국"의 문턱에 들어설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수출산업조사단"을 조직해 3월15일 일본으로
떠났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