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환 < 한국은행 총재 >

사람은 높은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성적이라면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모두 인과적 이익정도에 의하여 실체적 합리성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 선호에 따라 형식적 합리성을 추구할 것인가는 매우
흥미 있는 과제다.

그러나 현실은 실체적 합리성보다 형식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체적 합리성 선택을 밑받침할 수 있도록 기초정보를
충분하고 왜곡됨이 없도록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정보공개의 당위성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해도 신념의 실체적 합리성 선택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신념체계의 성립조건이 무엇인가, 신념과 욕구를 왜곡시키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등의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굳이 방법론을 되새기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가정되는데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탁월한 인식론 학자였으나 불행히도 젊어서 타계한 고 송현호 교수는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사물 판단에 관한 방법론을 깊이 연구했다.

"경제학 방법론"(비봉출판사, 1992, 5백1쪽)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그는 어떤 경우가 실체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길인가를 제시했다.

첫째,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인간은 실현 가능성(단, 가능성은
동태적으로 충분히 높일 수 있다)에 따라 욕구를 적응시키는 것이 실체적
불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 포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배고픈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가 매 달려 있는 것을 보고도 키가 닿지
않아서 따먹지 못했다.

실망한 여우는 배고픔을 달래며 돌아서서 말한다.

"저것은 어차피 신 포도여서 먹을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응적
합리성 선호형성의 예다.

둘째, 또 사람들은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이득을 수반하는
확률적 선택을 한다.

추첨이나 복권 같은 데에서는 위험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손실을 수반하는
선택에서는 위험을 수용하는 선택의 경우가 많다.

"수풀 속에 있는 여러 마리의 새보다 손아귀에 들어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더
가치 있다"는 속담이 그 예다.

아마도 인간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손실은 무리를
하더라도 모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곧 선택 상황의 재구성에 의한 선호 변화이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실체적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은 추론의 잘못 때문에 신념과 욕구를 비합리적으로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바둑에서 축관계를 착각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기존 관행을 수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주의력이 소요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되는 추상적인
경제인과는 달리 근본적으로는 오류의 가치의식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변화하는 시대에는 오류의 가치의식과 행동을 하루빨리 고치도록
계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런 인간의 행동양식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정책을 입안.시행함에 있어서 논리적 차원을 넘어서 실체적 측면까지
포함해서 국민들의 행동양식을 지켜보고 시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일 이런 실증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형식 논리적 합리성만을 중시해서
정책을 시행하면 자칫 시행에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인간 행동양식의 성찰을 통해서 잊혀졌던 집단적
인식문제를 다시 음미하게 하는 방법론 연구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