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국내 극장가에선 국산영화가 외산영화를 압도하는 기현상(?)이
일고 있다.

관객들이 할리우드 영화에 식상한 탓일까.

일부 화제작에 국한된 현상이긴 하지만 한국영화의 내수시장이 건재함을
보였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알려진 대로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흥행신기록을 세우며 미국의 대작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것은 하나의 쾌거였다.

"국산 활극치곤 잘 만들었다"고 관람성의를 보인 애국적 배려를 감안해도
말이다.

그런 중에 또 하나의 쾌거가 이영재 감독의 "내마음의 풍금"에서 소문없이
이뤄져 관심을 끈다.

"쉬리"의 5백만 기록엔 훨씬 못미치지만 40만이라는 적잖은 관객을 모았다.

"내 마음..."의 경우엔 할리우드 흉내가 지나친 "쉬리"와는 달리 우리의
토종정서를 담아 관객의 애국적 배려가 작용할 여지도 사실상 없다.

"쉬리"와 "내마음..."은 한국영화의 자존심을 일깨운 근래의 화제작이었다.

그런데 두 영화는 흥행의 주요변수로 작용하는 작품테마가 전연 딴판이라서
색다른 흥미를 갖게한다.

전자는 피비린내나는 살육이 벌어지는 90년대식 첩보활극이고 후자는 산골
마을의 인정가화를 담은 60년대식 서정극이다.

양극을 달리는 두개의 테마가 어떻게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계층의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좋은 영화라면 장르에 관계없이 소구력을 갖는 것은 진실이지만 문제의 두
작품이 성공한 배경엔 그런 진실 이전의 원천적인 인간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거기엔 비애와 쾌락을 함께 품는 한국인 가슴의 이중구조도 한몫 했을법
하다.

두 영화의 판이한 성격은 여주인공의 캐릭터에서 나타난다.

북한 공작원으로 나오는 "쉬리"의 여걸은 요인 암살을 도맡는 잔혹한
총잡이다.

순식간에 살인을 저지르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청소년의 우상형에 딱 맞아
떨어진다.

산골 초등학교 학생인 "내마음..."의 주인공은 파리 하나도 못잡는 나약한
소녀.

총각교사에 대한 짝사랑을 일기로 밖에 표현하지못하는 순정파로 오빠부대
틈에서 열광하는 요즘 여학생들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촌닭이다.

그래도 이 상극의 두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은 거의가 젊은층이다.

특히 "내마음..."은 흥행요소로선 가망 없는 "느림"이 심하다.

광란을 즐기는 젊은층에겐 수면제 성분이 다분한 데도 그들은 이 영화에선
졸림이 아닌 아련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느림의 미학"이 손님을 끌었다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인의 심성에 깊숙이 깔린 선량함과 순수함이 더 많이 작용한
것 같다.

섬세하게 그린 산골학교의 옛모습이 가슴에 닿는다.

무쇠난로에 층층이 쌓인 양은 도시락들은 학교급식을 즐긴 청소년들에게
아빠의 "소시적"을 확인하는 증명자료가 됐을 법 하다.

장년층은 지겨웠던 무말랭이 반찬을 떠올리며 새삼 "벤또 향수"에 젖었을
테고...

이런 해묵은 토속정취가 여전히 시장성을 갖는 것은 쾌락과 비애를 함께
품는 한국인 가슴의 이중구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쉬리"는 눈으로 즐기는 오락극이고 "내마음..."은 마음으로
즐기는 서정극이다.

소재의 차이를 뛰어넘어 활극을 좋아하면서도 서정극에 눈길을 보내는 것은
아름다운 변덕일 수도 있다.

한국인의 서정적 심성은 그 뿌리가 한일 수도 있지만 굳이 거기까지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귀가 따가운 "쉬리"의 총소리를 즐기던 젊은 관객들이 산골학교의 유량한
풍금소리에 끌리는 것 자체가 흐믓한 일이 아닌가.

< jsrim ( 편집위원 )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