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 규모로 풀린 퇴직금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경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금리의 향방을 좇아 고금리 금융상품을 따라다니며 금융시장에 새로운
판도를 형성했다.

달구어진 증시에 본격적인 불을 붙인 자금에도 퇴직금이 들어가 있다.

금융시장에서 부풀려진 퇴직금이 새로운 투자자금과 소비자금으로 쓰이며
실물시장을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국가경제 전체로 치면 계량화하기엔 작은 자금이다.

또 퇴직금은 성격상 함부로 쓰기 어려운 돈이기도 하다(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국내경제팀장).

실제로 작년말 실직가정 3백가구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절반가량의
응답자가 "고정수입이 없어 적금을 해약하거나 퇴직금을 쪼개 생활하고 있다"
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 원칙적인 인식과는 달리 한꺼번에 풀린 한국의 "IMF 퇴직금"은
상당히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지난 1년여의 기간에 한국경제가 워낙 요동을 쳤기 때문에 "뭉칫돈"들이
이곳저곳을 헤맬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한상춘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 1년여간 퇴직금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퇴직금의 성격이 안전을 택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제
여건이 퇴직금을 그냥 은행에 주저앉혀 놓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상당히 모험적인 투자자금으로 변질돼 움직였다는 얘기다.

가장 큰 변수로 금리동향을 들 수 있다.

금리가 한자리수로 떨어지자 증권시장과 창업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었다.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은행에서 증권시장으로 갔고 증시가 주춤거리면서
이번엔 실물시장을 겨냥하고 있는게 확연하다"는게 선한승 노동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의 분석이다.

퇴직자들이 점포와 소규모 기업을 내 전반적인 경기활성화에 기여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퇴직금이 속성과는 달리 움직였다는데 있다.

지나치게 부동자금화됐다는 점이다.

노후자금으로 은행권에 묶여 있어야할 돈이 증시를 자극하고 이번엔
실물로 옮겨와 투기자금화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주식투자로 불어난 퇴직금의 일부가 소비자금으로 쓰인다 하더라도
경기회복을 계속 이끌 자금은 아니다.

사치성으로 소모될 공산이 더 크다.

금융연구원의 최공필 연구위원은 이렇게 방황하는 뭉칫돈을 붙잡을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미국의 IRA(개인퇴직저축)와 같은 장기안정형 금융상품을 빨리
개발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 차병석 기자 chabs@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