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기원전 4세기께 성립되는 한국식 동검문화는 기원전 3~2세기께
그 절정기에 달한다.

이 때 각종의 청동의기와 함께 무덤에 부장되는 것이 고리가 2개 달린
정교한 기하학무늬가 있는 다뉴정문경이나 다뉴세문경이라는 청동기문화
고유의 거울이다.

이 거울은 아마도 샤만적 성격의 의례에 쓰여지는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뉴세문경은 예산 동서리,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 등 서해안과 그 인근지대에 출토되고 있다.

논산에서 출토된 것은 그 무늬의 섬세함이 현대인의 눈에도 놀랄 수준으로
1mm보다도 작은 간격으로 아주 가느다란 가는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께를 전후로 해 우리 청동기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다고 할 수있는 다뉴세문경은 사라지고 만다.

대신 그자리에 중국 한나라 거울이 묻히기 시작한다.

익산 평장리, 영천 어은동 등에서 나온 중국 한나라 거울이 그 예이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이후 동북아시아에 강요된 중국적
세계관및 가치관의 유입과 그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중국 한경이 새로운
신분과 질서를 나타내는 위세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 한경은 고대무역의 한 형태라고 할 수있는 조공에 대한 대가로 얻어 온
것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한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국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한경을 본떠 만든 가짜 중국거울이 유행했다.

이른바 방제경이라는 가짜의 존재는 당시 사회질서를 어지럽게 했다.

방제경은 한군현이 그 제작을 막지 못했다는 면에서 그들의 통치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삼한사회의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방제경을
만들어 배포할 만큼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 당시 사람들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경을 자신의 권위와 신분유지를
위해 크게 필요로 해 방제경이라도 소유하고 싶어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