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저널] '딴지와 드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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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에 언론혁명이 일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유발된 언론계의 기술적 혁명은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진부한 얘기다.
하지만 언론자유, 공정성, 투명성 등 보다 본질적 문제와 관련한 언론분야의
조용한 혁명은 아직까지 세심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엉뚱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는가 라는 의문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에 대한 표면적 답은 우선 긍정적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재단인 프리덤 하우스는 최근 발표한 99년 연례보고서
에서 아시아국가중 일본 한국 필리핀 태국 그리고 몽고가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언론이 프리덤 하우스가 평가하듯 진정한 의미의 완전자유
를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는 부정적 반응이 적지
않다.
실제로 프리덤 하우스의 한 관계자는 언론이 자유롭다고 분류된 국가라고
해서 완전한 형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언론사에 대한 <>친 정부인사 심기 <>누군가를 편들기 위한 TV
방송의 카메라 및 음향조작 <> 도청을 통한 취재활동 방해 <>국세청 등
신문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을 통한 은근한 압력행사 등은
완전한 형태의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 들이라는 게
프리덤 하우스의 지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같은 통제수단은 여전히 엄존한다는 설명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광고주, 주주, 언론사 내부 상사의 은근한 압력 등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완전한 언론자유를 위축시키는 가장 큰 제약요인은 외부압력수단의
적극적 동원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미리 알아서 기는 문화 라는 지적도
있다.
적은 언론 내부에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멀지않아 이같은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아닐 공산이 크다는
분석은 우리의 더 큰 흥미를 끈다.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은 장기적으로 이런 우려를 한꺼번에 뛰어
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토종 딴지일보 와 모니카 르윈스키사건을 처음으로 폭로한 미국의 드러지
(Drudge) 리포트 같은 존재는 이같은 예견을 뒷바침한다.
이들의 예에서 읽을 수 있듯, 사이버 언론은 거의 자본이 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시민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신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홀로 신문''의 정보가치가 부족하다 싶으면 온 지구촌을 상대로 뜻을
같이 하는 기자를 모집하고 임명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하바드 예일 옥스퍼드대 등의 교수 학생을 기자로 임명하거나
초청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기사작성상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보다 자유로운 여건에 있는 지구촌 저편의 동료사이버기자에게 자신이 구득한
정보를 제공, 그쪽에서 이를 사이버 스페이스에 게시토록 협조를 구하면
그만이다.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그 어떤 굴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수단이 사이버
라는 우주공간에 널려 있다는 뜻이다.
종이, 인쇄, 배달이라는 고비용과정은 아예 걱정거리가 아니다.
지면은 얼마든지 있다.
내용만 있으면 소화는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마감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도 없다.
수정, 가감보완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다만 언론으로서의 신뢰성과 공정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본의 아닌 권리침해
등이 사이버 언론이 안고 있는 우려라면 우려다.
이같은 맥락에서 사이버언론과 제도권 언론의 향후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의제임이 틀림없다.
신문사는 이념논쟁을 제외하곤 편가르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 신문사는 누구 편이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어쩌면 무균질 목소리 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돈, 공간,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이같은 인류의
목표추구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http://bjGloba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3일자 ).
인터넷의 등장으로 유발된 언론계의 기술적 혁명은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진부한 얘기다.
하지만 언론자유, 공정성, 투명성 등 보다 본질적 문제와 관련한 언론분야의
조용한 혁명은 아직까지 세심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엉뚱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한국에 언론자유가 있는가 라는 의문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에 대한 표면적 답은 우선 긍정적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재단인 프리덤 하우스는 최근 발표한 99년 연례보고서
에서 아시아국가중 일본 한국 필리핀 태국 그리고 몽고가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언론이 프리덤 하우스가 평가하듯 진정한 의미의 완전자유
를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는 부정적 반응이 적지
않다.
실제로 프리덤 하우스의 한 관계자는 언론이 자유롭다고 분류된 국가라고
해서 완전한 형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언론사에 대한 <>친 정부인사 심기 <>누군가를 편들기 위한 TV
방송의 카메라 및 음향조작 <> 도청을 통한 취재활동 방해 <>국세청 등
신문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을 통한 은근한 압력행사 등은
완전한 형태의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 들이라는 게
프리덤 하우스의 지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같은 통제수단은 여전히 엄존한다는 설명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광고주, 주주, 언론사 내부 상사의 은근한 압력 등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완전한 언론자유를 위축시키는 가장 큰 제약요인은 외부압력수단의
적극적 동원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미리 알아서 기는 문화 라는 지적도
있다.
적은 언론 내부에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멀지않아 이같은 논쟁은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아닐 공산이 크다는
분석은 우리의 더 큰 흥미를 끈다.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은 장기적으로 이런 우려를 한꺼번에 뛰어
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토종 딴지일보 와 모니카 르윈스키사건을 처음으로 폭로한 미국의 드러지
(Drudge) 리포트 같은 존재는 이같은 예견을 뒷바침한다.
이들의 예에서 읽을 수 있듯, 사이버 언론은 거의 자본이 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시민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신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홀로 신문''의 정보가치가 부족하다 싶으면 온 지구촌을 상대로 뜻을
같이 하는 기자를 모집하고 임명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하바드 예일 옥스퍼드대 등의 교수 학생을 기자로 임명하거나
초청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기사작성상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보다 자유로운 여건에 있는 지구촌 저편의 동료사이버기자에게 자신이 구득한
정보를 제공, 그쪽에서 이를 사이버 스페이스에 게시토록 협조를 구하면
그만이다.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그 어떤 굴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수단이 사이버
라는 우주공간에 널려 있다는 뜻이다.
종이, 인쇄, 배달이라는 고비용과정은 아예 걱정거리가 아니다.
지면은 얼마든지 있다.
내용만 있으면 소화는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마감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도 없다.
수정, 가감보완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다만 언론으로서의 신뢰성과 공정성 그리고 타인에 대한 본의 아닌 권리침해
등이 사이버 언론이 안고 있는 우려라면 우려다.
이같은 맥락에서 사이버언론과 제도권 언론의 향후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의제임이 틀림없다.
신문사는 이념논쟁을 제외하곤 편가르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 신문사는 누구 편이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어쩌면 무균질 목소리 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돈, 공간,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이같은 인류의
목표추구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반려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http://bjGloba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