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현 < 연세대 교수 / 경영대학원장 >

한국정부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거시경제와 제도개혁에
대한 협약을 맺은 지 1년 반이 지났다.

나라 전체가 그동안에 전쟁을 치른 것 같기도 하다.

가정이나 기업들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환율정책의 잘못과 금융감독 소홀 등의 정부 정책의 실패 탓으로 국민들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기가 막힌 노릇이다.

조직이든 국가든 지도자를 잘 만나야 그 구성원들이 잘 살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IMF체제 1년 반, 그동안 무엇이 변했나.

첫째는 많은 기업들이 몰락하고 재벌의 판도가 바뀌었다.

소위 30대 재벌중 절반가량이 도산하거나 법정관리, 화의 또는 워크아웃
대상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30대 재벌이라는 기준이 필요없게 되었다.

둘째는 실업자가 양산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신화가 무너졌다.

이제는 평생직업을 생각하고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장래를 보장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셋째는 사회전체가 서서히 업적주의로 전환해가고 있다.

연봉제, 스톡옵션 등 능력과 실적에 따라서 보상받는 제도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밥그릇만 채우면 승진 승급을 받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빈부의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넷째는 국내경제에서 외국기업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주식시장에서의 외국 기관투자가의 비중이 커졌음은 물론이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규모도 커져서 일부 산업의 경우는 외국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도 전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책결정과정과 정부 및 기업의
운용에 대해서 영향력이 켜졌다.

이러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반면에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전통들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첫째로 관료지배 경제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세 정권의 경과를 보면 집권초기에는 학자 등
외부인사를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경제정책부서 장관에 기용했다가 대개 1년
정도 지나면 이들은 전통관료로 바뀌었다.

대통령의 눈으로 보면 관료들이 일을 더 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조직을 장악하고 정보를 챙기는 일에 있어서 외부인들이 관료를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 환란의 원인인 정부주도 경제운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금융개혁의 필요성이 있다고는 하나 금융감독위원회의 시장개입은 과거
재경원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간섭도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두번째로는 재벌중심의 경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경제력 집중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재벌판도는 바뀌었으나 3~5대 재벌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투자나 거래를 하는데 도산위험이 낮은 기업을 선호하다
보니 대재벌로 자원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부정부패의 뿌리는 매우 깊어서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상부층의 부패는 연고주의라는 문화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어디까지가 부패인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민원부서, 경찰과 세무관리들의 부패는 먹이사슬로 이어진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쉽게 단절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넷째로 뿌리깊은 평등주의 사상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부 자체를 죄악시하고 소비를 비판하는 의식은 국민들 마음속
가운데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 초 어두운 시대에 대학을 다닌 소위 386세대들이 언론기관
등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진 반체제적 사고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이처럼 평등주의와 반체제적 사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로 사회의 불신은 과거보다도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이
느껴진다.

도둑맞은 사람보다 도둑의 말을 더 믿는 국민이 많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번의 "옷 사건"만 해도 사건자체 내용이 너무나도 저질이다.

우리 사회에 불신의 골이 매우 깊이 박혀있다고 생각된다.

기존의 지역간 갈등, 계층간 갈등에다가 이제는 세대간 갈등까지 겹쳐서
사회 전체가 파편화하고 조직이 와해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쓰다 보니 너무나 비관적인 글이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너무나 많은 나쁜 전통들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바꾸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관주도 경제의 병폐는 공무원의 채용방법과 인사관리로 풀어나가야 한다.

고시제도를 없애고 개방형 임용제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재벌개혁도 기업을 글로벌 경쟁에 노출시키면서 이들이 경쟁력을 갖는
방향으로 유도해 나가야 한다.

1~2년의 개혁으로 사회나 경제를 바꾸기에는 우리의 전통이 너무 뿌리가
깊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