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호 < 사회1부장 >

1589년8월18일 중부유럽 트리어의 참심법원.

트리어 법학대학 학장이던 디트리히 플라데 박사가 잡혀와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재판정의 의장이었던 명망있는 법학자였다.

-그대는 2년전 악마들과 안식일 모임을 가졌는가(재판관).

"종종 수도원에서 열린 악마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플라데)"

-팔첼에서 46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치고 소나기를 만들 때 그곳에 있었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나기는 여자들이 만들었습니다"

-소나기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악마의 이름을 부르며 채찍으로 시냇물을 내리치면 튕겨나가는 물이 소나기
로 변합니다"

-그곳에는 누가 함께 있었는가.

"발트라흐 신부와 피들러 시장, 시청의 발데크 국장이 있었습니다. 엘제
부인과 마가레타 수녀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작년에 내린 홍수도 너희들이 한 짓이냐.

"우리는 여러해 전부터 매년 소나기를 만들고 과일을 썩게 했습니다. 곡식이
열리지 않게 하고 까마귀 떼를 불러온 것도 우리였 습니다"

-마가레타와는 무엇을 먹었느냐.

"오이렌 근처의 들판에서 만났을 때는 어린아이의 심장으로 만든 팬 케이크
를 먹었습니다. 두꺼비도 즐겨 먹습니다"

소설이 아니다.

실제 장면이다.

바로 "마녀재판" 현장이다.

계속되는 실황은 더이상 중계방송할 필요도 없다.

말도 안되는 질문과 답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증언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듣고싶어하는 모든 말들이 "창작"된다.

그동안 있었던 나쁜 일들은 모두 피고의 죄로 "확인"된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예정된" 사람들의 이름이 튀어 나온다.

플라데 박사는 그해 9월18일 참수형을 당했다.

재판관이 원하는 대로 진술해 준 데 대한 "은총"으로 산채로 화형당하는
일만은 면했다.

4백년이상 유럽을 핏빛으로 물들인 이른바 "마녀사냥"은 늘 이랬다.

누군가의 "밀고"로 시작됐다.

그 뒤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불안한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계략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한결같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흉작인 해엔 마녀들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개구리가 유달리 시끄럽게 울어도 마녀 탓이었다.

사냥이 한창일 땐 그저 "얼굴이 고양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

모진 고문, 허위 증언, 거짓 자백이 횡행했다.

4세기 뒤 지구 반대편의 서울에선 "마녀사냥"이라고 이름붙여진 또다른 재판
이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밍크 게이트"다.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고 아우성들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시공을 건너 뛴 두 사건은 확실히 닮은 데가 있기는
하다.

우선 출발부터 그렇다.

서울의 마녀사냥도 누군가의 "밀고"로 불이 붙었다.

한참전에 덮어둔 일을 들추어 내 흘렸다.

속 깊은 내용을 아주 잘 아는 권력심층부가 그 진원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경찰과 검찰 간의 힘 겨루기건, 여권의 신주류와 구주류의 갈등에서
였건 의도적인 누설이 있었다.

그 목적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데도 유사점이 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용한 인물이 장관으로 발표되자마자 터진 것을
보면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인상이다.

납득안가는 증언들이 난무한 장면도 닮은 꼴이다.

옷을 어디서 얼마나 사갔고, 돈을 누가 냈는지도 제각각이다.

날짜도 뒤죽박죽이다.

"코트 입은 것을 봤다"는 사람은 "팔에 걸치기만 한 걸 잘못 봤다"고
뒤집었다.

"옷값을 대신 내달라고 요구받았다"더니 "잘못 알았다"고 번복했다.

수사에선 필요한 증언만 채택됐다.

짜맞추기 일색이었다.

막판엔 의아하기 짝이 없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동원됐다.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는 데 이르면 두 사건은 난형난제다.

밤을 지새우며 수사했지만 수사결과를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녀
사냥 때와 다르지 않다.

결국 진행과정만을 보면 영판 빼다 박은 마녀사냥이다.

문제는 본질이다.

이번엔 국민이 그 심판자였다는 대목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고관부인들의 비뚤어진 로비행태를 바로 잡으려는 대중여론의 발기였다.

"시냇물로 소나기를 만드는" 황당무계한 조작은 더더욱 아니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도 명확한 실체가 있었다.

그래도 마녀사냥이었다면 반발하는 여론을 나무랄 게 아니다.

오히려 사태의 전말을 "마녀사냥식"으로 끌고간 권력층의 행태를 먼저 단죄
할 일이다.

밀고와 정치적 흥정, 거짓 증언, 엉터리 여론조사, 편파 수사를 한 기득권
층이 치죄 대상이어야 한다.

6.3재선에서 야당에 몰표를 던진 시민들이 "마녀사냥꾼"이 아니고 그 결과가
"마녀재판"이 아닌 이유다.

< manh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7일자 ).